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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 연상호의 '서울역'

연상호는 전작들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지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악귀들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 좋은 일이나 착한 사람은 없으며, 있더라 해도 그들은 곧 나빠지거나 결국 죽고 만다. '부산행'이 첫 번째 실사 영화 연출로서 많은 부분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라면 '서울역'은 우리가 알고 또 기대했던 연상호의 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다루는 필드가 조금 더 커졌다는 점이다.

  • 허경
  • 입력 2016.08.23 10:38
  • 수정 2017.08.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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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한 노숙자였다. 뭐에 물렸는지, 어디 넘어져 다쳤는지 모를 노인은 길거리에서 죽어간다. 평소 그를 형님 형님 하고 따르던 다른 노숙인은 치료를 위해 노숙인 센터에도 가보고, 약국도 찾아가지만 경찰도, 센터 직원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냉담한 반응만을 볼 뿐이다.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노인은 숨이 끊어지고, 그제서야 역무원들을 움직인다. 하지만 그의 시체는 자리에 없다. 우연히 발견된 그는 그 어느때 보다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사람을 먹고 있었다. 좀비가 되었다.

혜선은 가출 청소년이다. 이제 19살 된 소녀는 나이에 비해 어지러운 과거를 가졌고 지금도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병든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왔지만 창녀촌을 전전하며 성매매를 하다가 지금의 남자친구 기웅을 만나 서울역 인근(아마도 청파동 혹은 중림동 일대가 아닌가 싶다) 여관에 달방을 잡고 피례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기웅은 매일을 PC방을 전전하며 소일하는 듯하다. 돈이 떨어져 숙박비도 낼 형편이 안되는 상황에서, 그는 혜선을 성매매에 이용하기로 한다. 인터넷에 원조교제 홍보 글을 올리고, 하기 싫다는 혜선을 협박한다. 그때, 우연히 홍보글을 보게 된 석규는 기웅에게 연락을 한다. 집나간 혜선의 아버지인데, 그녀를 찾아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 혜선은 기웅을 떠나 정처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좀비들이 도착한다.

연상호는 전작들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지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악귀들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 좋은 일이나 착한 사람은 없으며, 있더라 해도 그들은 곧 나빠지거나 결국 죽고 만다. <부산행>이 첫 번째 실사 영화 연출로서 많은 부분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라면 <서울역>은 우리가 알고 또 기대했던 연상호의 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다루는 필드가 조금 더 커졌다는 점이다.

<지옥 : 두개의 삶>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다뤘고, <돼지의 왕>은 학교, <창>은 군대, <사이비>는 시골마을로 배경을 국한시킨 뒤 바짝 다가가 인간이란 얼마나 가볍고 사악한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역>은 조금 더 거리를 둔다. 공간은 '서울역 인근'이라는 장소로 국한되지만, 한국 사회의 단면을 담아보려는 야심을 보인 것이다. 다짜고짜 좀비가 등장하고 사람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고, 정부는 이를 노숙인들의 폭동으로 오해, 멀쩡한 사람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끔찍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정말 끔찍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숙자, 노인, 여성, 가출 청소년 등의 사회 최하층 약자와 이들보다 아주 약간 나은 평범한 사람들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연상호에게 진짜 지옥에 '잘 나가는 사람들'은 없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고 조금 더 먹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다가 모두가 좀비가 되어버린다. 이 영화에는 <부산행>의 용석(김의성)이 없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그런 모양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맹한 상태를 유지하는 혜선은 결국 석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혜선을 꼭 만나야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이 때 석규의 말과 행동은 그것이 얼마나 과장되고 위악적인지는 둘째로하고, 하여간 결말을 합리화시킨다. 대체 이 xx의 뇌는 어디에 달려있는 것인가.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이라기 보다는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산행>이 그래도 인간이 가진 선한 마음에 기대를 거는 이야기였다면, <서울역>은 차라리 좀비가 낫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쓰레기만 가득한 세상에서, 맨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고 싶어? 이래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래 나 같아도 차라리 좀비가 낫겠다'싶은 생각이 든다. 시스템이고 사람이고 다 저 모양인 판국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봤자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지 않을까?

앞서 '야심'이라고 말했듯 좀 더 큰 절망을 다루려는 시도였던 <서울역>은 메시지에 있어서 섬뜩함을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출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전작들은 인물들에 매우 바짝 붙어 세밀한 것들을 지켜보는 것에서 발생하는 섬뜩함들이 관객들을 얼얼하게 만들었지만 이번 작품은 아무래도 한 발짝 멀어지다보니 사건 단위로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인물들은 매우 평면적이고 사건들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악적이며 필요이상으로 직접적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련미나 정교함보다는 관객을 후두려패는 듯한 직진성이 매력이긴 했지만, 다루는 판이 달라지면 묘사의 방식도 달리져야 한다. 기술적인 완성도 역시 마찬가지다. 좀 더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많은 지적을 받고 있는 목소리 연기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서울역>은 연상호 감독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를 많이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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