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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키니 논란은 지금 프랑스의 불관용을 보여준다

ⓒTIM WIMBORNE / Reuters

올해의 논란은 아주 나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부르키니 논란은 널리 퍼진 분노를 수면 위로 끌어냈다. 프랑스 사회의 일각은 모든 문제를 계속해서 '외국인들', 즉 무슬림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최고위 정치인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논란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배제와 의심의 수사의 편을 들고 있다. 그들은 원인에 대해서는 의논하지도 않고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만족한다.

이슬람은 모임에서는 박수를, 소셜 미디어에서는 좋아요를 얻어내는 수단이 되었다. 견해는 140자로 축소되었다. 트위터가 정식 논의의 장이 되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오늘날의 세상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성적 논의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사람들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금의 부르키니 논란이 그 증거다. 공론은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생략과 일반화가 혼란을 퍼뜨리고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

프랑스에서 그것은 시민들이나 수영복이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다. 부르키니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다. 공공 수영장에서 위생상의 문제로 금지될 때가 있을 수도 있고, 시장들이 부르키니가 해변에서 공공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을 때 지자체령으로 금지하기도 한다.

부르키니를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이나 살라피즘과 연관짓는 사람들에게는 부르키니는 레바논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인 아헤다 자네티가 2004년에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게 좋다.

부르키니 논란을 둘러싼 증오의 담론을 살펴보자.

부르키니 논란을 멈춘다 해도, 우리는 핵심 이슈인 세속주의와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히잡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논의는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논의의 근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정치 엘리트들이 생략과 일반화를 하면 모두 방어적이 되고, 그러면 실질적인 논의를 하지 못하게 된다.

장 가뱅이 영화 'Un Singe en Hiver 겨울의 원숭이'에서 말하듯, "모든 일엔 결과가 따르고, 거시기는 거시기를 만들고, 무작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르키니에 대한 논란은 세속주의, 테러리즘, 사우디 아라비아, 인권, 프랑스 외교 정책 등 여러 다른 이슈들과 엮이게 된다.

그러므로 전신 수영복에 대한 논의는 인권, 프랑스와 걸프 왕국들과의 관계를 아울러야 한다. 이것은 히잡이 여성을 노예화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타당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부르키니는 여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민주주의 국가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정당하나, 걸프의 석유 왕국들이 언제나 사회의 모든 악들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같다.

과장법과 논증법으로 논의는 계속 퇴행하고, 아무도 시간을 들여 핵심 이슈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이 부르키니 논란으로 드러나는 프랑스 사회의 상태는 무시무시하다. 우리의 가치가 왜곡되었다는 걸 볼 수 있다. 공포에 의해 힘을 얻은 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 매체는 정보 전달보다는 감정 자극에 힘쓴다. 법을 들먹이는 사람은 즉시 사우디 로비 자금을 받은 이슬람주의자 협력자로 간주된다. 부르키니에 반대하면 이슬람을 혐오하는 인종 차별주의자라 불린다.

공론은 어디 있는가? 대선 후보 중 이성의 목소리에 관심을 모을 사람이 있긴 할까? 극도로 긴장된 지금 분위기에서 누가 우리의 가치를 되살릴 것인가? 누가 크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프랑스에는 프랑스의 무슬림들을 위한 정당한 자리가 있으며, 그들의 인권은 다른 어떤 시민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보장되어 있다고 선언할 것인가?

당국이 계속해서 무슬림 기관에 간섭하는데, 누가 대중에게 1905년의 정교 분리법을 상기시켜 줄 것인가? 프랑스의 모스크 중 외국 자금을 받는 곳은 소수에 불과하며, 프랑스 국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는 관리 하에 이뤄진다는 걸 누가 상기시켜 줄 것인가?

우리는 왜 이 주제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 즐기는가? 끔찍한 니스 테러와 하멜 신부 살해 사건 이후, 우리가 왜 무슬림들이 예배를 보는 곳에 대한 해외의 자금 지원과 테러리즘을 연결해야 하는가?

정부 최고위층에서 테러리즘에 대한 싸움의 일부로 이슬람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가장 극단적인 이론들이 힘을 얻는다.

우리를 화합시키는 게 아닌 분열시키는 것들을 더 강화하려는 끊임없는 욕구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수호하고 퍼뜨려야만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테러리즘에 맞서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며, 급진화된 청년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들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소외된 청년들은 다에시(ISIS)로 밀려난다. 다에시는 우리가 부르키니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즐거워하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다에시는 이 논쟁을 사용해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 봐, 이 나라는 너희 것이 아니야. 너희 여성들은 오명을 쓰고 있고, 그들의 단정함이 존중받지 못하잖아. 법은 절대 무슬림 편이 아니야. 우리 손을 잡아."

소셜 미디어에서 보는 폭력, 그리고 이성적인 목소리의 부재는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끔찍한 올 여름, 우리는 왜 우리를 나치에게서 자유롭게 만든 영웅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들은 온갖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왜 우리의 자녀들과 바깥 세상에 보여주는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슬람의 조직과 기능에 대한 상원 프로젝트와 함께 편견이 없는 보고서를 만든 바 있다. 프랑스의 이슬람은 우리의 법, 그리고 1905년 법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게 명백히 밝혀졌다. 이 진지하고 교육적인 보고서는 이 상황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무슬림 시민들이 존엄을 가지고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술적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한 논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시시한 정치 유세에 도움이 되는 공포의 물결을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논리를 억압하고 감정을 살리는 이 분위기를 개탄한다. 공포, 연민, 연쇄 반응은 이해하지만, 현재 정치 지도자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법은 어디에나 적용되어야 한다. 증오 발언은 절대 용납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평정을 다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공화주의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 세속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The Burkini Debate Sheds Light On The Widespread Intolerance In Franc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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