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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올림픽은 ‘올림픽 난민'을 발생시켰다. 30년 전, 서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 강병진
  • 입력 2016.08.19 11:06
  • 수정 2016.08.19 13:18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승전보와 미담, 그 외 갖가지 해프닝이 함께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올림픽의 화려함에 가려진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알려지는 중이다. 8월 17일 허핑턴포스트US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공원 근처에 있는 ‘오트드로모’(Autódromo)라는 빈민가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평온한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이 더 살기 열악해진 건, 지난 2009년 IOC가 리우데자네이루를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수많은 빈민가처럼 이 마을 또한 정부의 계획하에 철거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쫓겨나야 했다. 한때 600가구 이상이 살던 ‘오트드로모’에는 현재 20가구 정도만이 남아있다. 브라질 정부는 올림픽 공원과 가까운 곳에 빈민가가 있다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올림픽 때문에 생겨나는 ‘올림픽 난민’의 사연이 리우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체육대학교의 박보현 박사가 지난 2010년 ‘한국스포츠개발원’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경우 매월 1만 3천명이 올림픽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도시에서 쫓겨난 가운데 총 150만 명에 이르는 도시 난민이 발생”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는 1만 여명의 로마계인들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때는 11,000여명이,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때는 624가구 2,000여명의 도시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88 서울 올림픽도 ‘올림픽 난민’을 발생시켰다.

박보현 박사는 이 글에서 올림픽 준비와 함께 시작된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인한 “‘도시빈민운동’은 1983년부터 1988년을 지나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각 빈민지역, 오금동, 사당동, 신정동, 하왕십리, 암사동, 신당동, 양평동, 오금동, 송파·강동지구 등 200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상계동’ 173번지에 살던 80여 세대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1985년 8월부터 88년 2윌까지, 상계동 주민들의 주거권 투쟁사를 담은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역시 도시 미관 개선과 재개발 사업을 유도하며 상계동 173번지를 철거하려 했다. 주민들은 시청을 찾아다니고, 전경과 맞서며 버텼다. “때린 사람이 풀려나고 맞은 사람이 잡혀가는 이상한 싸움” 속에서 “빨갱이 같은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던 그들은 당시 시청 관계자로부터 “주민들끼리 하는 재개발이기 때문에 아는 게 없다”거나, “딱한 처지는 이해하지만 우리 후손과 올림픽을 위해 조금 손해를 감수한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리고 결국 87년 4월 14일 상계동을 떠나게 된다.

갈 곳이 없는 그들이 임시 거처를 마련한 곳은 명동성당이었다. ‘상계동 올림픽’에 따르면, 두 개의 임시천막을 남자-여자 숙소로 세워 살던 그들은 “살다보니 한 평에 1억원짜리 땅에서 산다”거나 “어차피 집이 없으니, 쫓겨날 집도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등의 자조적인 대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88년 1월, 그들은 부천시 고강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다. “고속도로에 바로 인접한 곳이었지만, 우리는 야산에 둘러싸인 새 삶터가 대견스러웠다.” 그들은 일단 다시 가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이 마저도 다시 철거되고 만다. 부천시청 직원들과 전경들이 그들의 새로운 집을 철거한 이유는 “고속도로로 성화가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상계동 178번지 사람들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당장 겨울을 나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10개월을 살았다.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시간 동안에도 그들은 땅굴에 있었다.

당시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상계동 올림픽’을 찍었던 김동원 감독은 지난 2007년 9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의 후일담을 이야기한 바 있다.

“서울시와 천주교, 상계동 재개발 건축업체는 돈을 모아 그들에게 내줄 땅을 마련했지만 평당 30만원이던 땅값이 1년 새 240만원으로 8배나 뛰어오르면서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결국 그들에게는 가구당 8평씩의 땅이 나눠졌다. 땅을 팔 사람은 팔고 나가고 이곳에 살 사람은 살라는, 합리적인 듯 보이나 손쉬운 방책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상계동 주민들이 보여준 이상적인 공동체 운동의 움직임에 끌렸던 김동원 감독은 서로 믿었던 사람들이 불신을 안고 이별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30년 전, 서울에서 벌어진 일이 이후 4년 마다 반복되었고 결국 리우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4년 후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여는 도쿄의 사정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3년 ‘머니투데이’는 재팬타임즈의 기사를 인용해 도쿄에서도 경기장 증축으로 인해 200여 가구가 강제 이사를 가야할 처지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중 한 노인은 1964년 올림픽 때도 집을 내주어야 했는데, 2020년 올림픽 때문에 또 다시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올림픽 난민'은 그 이후의 올림픽에서도 발생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하지만 강제 이주를 당한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제공받게 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상계동 올림픽'은 철거민, 노동자, 도시빈민에 관한 3편의 다큐멘터리를 엮은 '이상한 나라의 데자뷰'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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