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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극복할 여성들의 정치가 필요하다

군가산점 위헌 판결 때부터 메갈리아 논란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들이 진짜 적이 아니라 엉뚱하게 여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크다. 설령 메갈리아가 문제 있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후원 티셔츠 구매 인증에 대해 벌어진 공격은 부당하다.

  • 김명환
  • 입력 2016.08.18 10:24
  • 수정 2017.08.19 14:12
ⓒ연합뉴스

최근 게임업체 넥슨의 게임 캐릭터 목소리를 담당한 한 여성 성우가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고 찍은 인증사진에서 비롯된 일파만파의 갈등이 가상공간의 안팎을 넘나들었다. 남성 소비자들의 항의에 넥슨 측은 해당 성우의 목소리를 빼버렸고, 이에 반발한 여성들의 회사 앞 시위와 온라인상의 격렬한 공방 속에 정의당이 넥슨을 비판한 산하 문예위원회의 논평을 철회하는 해프닝도 더해졌다. 이 사태는 한국사회의 심각한 성차별은 물론이고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도 자신이 성차별의 잠재적 가해자일 가능성을 깊이 성찰하는 감수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동시에 메갈리아라는 다소 낯선 그룹의 실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논란 중에 극단적 언어와 감정이 온라인에서 과잉소비되는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다행히 차분한 분석과 진단 들이 다양한 언론매체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소모적이고 극단적인 갈등의 이면

이번 일은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 직후 여성 일반을 향해 쏟아졌던 싸이버 언어폭력에 대한 기시감을 자극했다. 요즘도 군가산점 부활 주장이 심심찮게 당국자의 입에 오르지만, 당시 헌재의 결정문은 소수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치열한 공무원시험 등에서 3~5%의 가산점은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며,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장애인과 군대를 못 간 남성에게도 위헌적인 차별임을 분명히 밝혔다. 더구나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원이 될 게 아니라면 군필 남성이라도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비(미)취업자에게는 손톱만큼의 혜택도 없는 제도였다. 군에서 고생한 젊은 남성에게 공평한 보상을 하려면 직업훈련, 세제혜택 등 보편적 지원책을 도입해서 비용을 감당해야 하지만, 국가는 군경력이 없는 이들을 차별하는 군가산점제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보상의 시늉만 냈다. 한마디로 이 일은 남성 대 여성의 이해가 충돌하는 사안이 아니라 소외된 청년층 일반의 문제였던 것이다.

군가산점 위헌 판결 때부터 메갈리아 논란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들이 진짜 적이 아니라 엉뚱하게 여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크다. 설령 메갈리아가 문제 있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후원 티셔츠 구매 인증에 대해 벌어진 공격은 부당하다. 또 논란이 된 성우를 지지한 일부 웹툰 작가들과 충돌한 끝에 웹툰 검열에 찬성하자는 반응을 보인 이들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메갈리아 또한 '미러링'(mirroring)이 제한적인 도구라는 점에 대해 스스로 소홀했다. 미러링이 불러온 사회적 파장을 성과로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흉악한 혐오발언을 거울에 비춰 보여주는 어휘와 어법을 계속 쓰면 어느 순간 약효는 떨어지고 반사회적 집단으로 몰릴 가능성은 높아진다. 문학에서도 어둡고 타락한 현실을 성역 없이 묘사하겠다는 자연주의 사조는 일정한 충격효과를 뺀다면 훌륭한 작품을 낳지 못했다. 뜨거운 인간애와 저항정신에서 나온 신랄한 풍자도 적재적소에서 터지지 않고 타성으로 굳어지면 효과는 금세 반감된다. 또 혐오언어를 되돌려주는 일에 골몰하다보면 혐오에 오염되는 법이다. 물론 앞으로도 미러링이 더없이 효과적일 때가 있겠지만, 현실을 바꿔낼 새로운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메갈리아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듯이(한겨레 2016.7.30.), 성차별사회를 더 크게 뒤흔들 정치의 언어로 진화해야 한다.

메갈리아는 '여자 일베'가 아니다. 그러나 미러링을 통해 뜻하지 않게 일베와 비슷해지지 않았는지 성찰할 필요는 있다. 김학준은 실증적 연구에서 대면조사가 가능했던 일베 이용자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왕따, 가난 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포기하고 "겪을 건 다 겪어봤다", 혹은 "누구나 그 정도의 고통은 겪는다"는 '평범 내러티브'를 내면화한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저항에 대해 이 '평범 내러티브'를 근거로 삼아 왜 너희만 떼를 쓰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사회적 연대와 거리가 먼 '냉소'가 그들의 행위 밑에 깔린 지배적 감정이라는 것이다(김학준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일베가 체제 순응을 내면화하면서 동시에 지배자와 가진 자의 논리를 '열광적으로' 대변하는 배경에는 이처럼 뒤틀린 사고와 정서가 있다.

성차별사회를 극복할 정치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나에게 미러링의 언어는 남자는 도무지 구제불능의 종자라는 냉소를 조장한다는 의심이 든다. 물론 메갈리아에 모인 여성들의 생각과 분위기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냉소의 정서가 성차별사회를 극복하는 정치적 원동력이 되기는 어렵다. 메갈리아의 짧은 역사가 보여주는 분화 과정이 바로 이런 고민과 연관된 것으로 안다.

기성 정치의 표류는 성평등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이다. 최근 정권들의 퇴행이 겹쳐져 더욱 악화된 성차별은 젊은 남녀들을 서로 낯설다 못해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낯선 존재의 만남은 새로운 삶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양성(兩性)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지만, 미지의 젊은 여성과 남성의 만남은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이다. 그런 시작을 자연스럽고 평등하게 만들 정치를 갈구해야 한다. 온라인을 뒤덮은 증오와 혐오의 비상한 열기에서 내년 대선이 우리 역사의 큰 고비임을 잊는 정치허무주의의 냉소를 감지하는 것이 그저 엉뚱한 반응일까. 문제는 정치이다. 그래서 메갈리아의 기치 아래 모였던 여성들이 '강남역 추모' 등에서 거둔 만만찮은 정치적 성과를 어떻게 진전시킬지가 기대된다.

정의당이 메갈리아 찬반 프레임에 휘말려 방향타를 잃은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다른 정당의 지도부는 더욱 구태의연하고 그들의 민의 수렴 장치는 오작동 중이다. 문제는 어떤 구체적 노력을 통해 평범한 청춘남녀의 밑바닥 민심과 정당의 의제 설정을 소통하게 할 것인가이다. 하루아침에 풀 수 없을 난제이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외면하는 순간 기득권세력에 승리를 선사하게 된다. 더구나 메갈리아 사태는 한국의 후진성 탓만이 아니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상징하는 범세계적 현상과 맥이 닿는 폭발적 위험성을 내장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순식간에 살벌해지는 가상공간의 특성을 생각할 때,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동시에 메갈리아에 분노한 남성의 잘못을 꼬집는 일은 긁어 부스럼 꼴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젊은 남성의 감정을 예민하게 자극할 군가산점제까지 들먹인 것은 내가 물정을 몰라서는 아니다. 대화와 상호존중이 막힌 극단적인 형세에서는 정치의 기적이 불가능하다. 그럴수록 민감한 쟁점을 회피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대결하며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정치이다.

마지막으로 일화 하나. 1992년 여름 나는 개인사정으로 법원과 검찰청을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무덥고 온통 흐린 어느날, 서초역 출구를 나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법원 안팎을 수많은 여성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10년 넘게 계부의 성폭행에 시달린 한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와 모의하여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의 2심공판이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아홉살 때 당한 성폭행의 고통에 20여년을 시달리던 한 여성이 범인을 찾아가 죽인 한해 전의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법정에 선 두 남녀를 위해 모인 숱한 여성들의 투쟁은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계기를 열었고 여성운동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가 되었다.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이들의 싸움에 무심하던 평범한 남성으로서 나는 수많은 여성들이 눈앞에서 뿜어내던 에너지 앞에 새로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한해 전인 1991년에 (최근에야 무죄로 판명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상징하는 공안정국과,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분열과 침체 앞에서 내심 실망뿐이던 나에게 이들은 희망의 살아 있는 증거였다. 말없이 그들 옆을 지나가면서, 당신들 덕에 어린 내 아이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을 믿는다, 감사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믿음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내 믿음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청년층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현실과 얽히고설킨 성차별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쉽게 찾기 어렵지만, 당장 다음 학기 강의 내용에서부터 학내 성차별에 대한 대처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야무지게 챙겨야겠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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