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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人터뷰] '덕혜옹주'의 감독 허진호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뒤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고 한다. 결국 타국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강제로 결혼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이혼당하고, 딸까지 자살하고,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화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광경이 나왔는데 '아기씨'라 부르며 덕혜옹주를 마중하는 상궁들의 모습이 깊게 각인됐다. 당시 50대 중반에 다다르는 할머니가 된 상궁들이 과거 궁에서 입던 옷을 차려 입고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 민용준
  • 입력 2016.08.18 10:03
  • 수정 2017.08.19 14:12

<덕혜옹주>라는 제목과 허진호라는 이름을 한 줄에 넣고 보니 어딘가 낯설다는 기분이 느껴졌다. 멜로라는 장르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던 그가 롤타이틀 영화를, 실화를 바탕에 둔 시대극을, 그리고 멜로가 아닌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덕혜옹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허진호 감독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를 매단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긴 시절의 고민을 건너온 영화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사연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행복>(2007) 이후로 중국에서 <호우시절>(2009)과 <위험한 관계>(2012)을 만든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와 4년 만에 <덕혜옹주>를 발표했다. 오랜만에 한국영화를 촬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별한 소회가 있었을까?

디지털로 찍은 건 <덕혜옹주>가 처음이다. 중국에서 <위험한 관계>를 촬영할 때만 해도 대작은 필름으로 찍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디지털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현장에서 나름대로 적응하긴 했지만 확실히 낯설었다. 그리고 항상 현장은 낯설게 느껴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선 정통사극 톤인데, 타이틀 시퀀스 이후부터 일본을 배경으로 근대화된 이미지가 펼쳐지니 전후가 분리된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사극 톤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간성의 차이가 두드러지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투나, 복장도 그렇고.

솔직히 <덕혜옹주>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허진호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자꾸 감독 이름을 까먹게 되는 것 같았다. (웃음) 롤타이틀 영화는 처음인데 그만큼 인물 자체에 중점을 둔 작품이 처음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덕혜옹주라는 인물에게 끌린 이유가 궁금하다.

7~8년 전쯤에 TV에서 덕혜옹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때 마음이 움직였다. 영국 황실에서 공주가 태어나면 전세계가 주목하듯이 그 당시 덕혜옹주를 둘러싼 분위기도 그랬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낳은 딸이라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인지라 조선의 희망이고, 보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그 시절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마치 아이돌 스타에 관한 사생활을 다룬 기사가 나오듯이 덕혜옹주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기사도 많이 실렸다고 한다. 굉장히 암울한 시대였지만 큰 사랑을 받고 자란 만큼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다는데 아버지인 고종이 독살을 당했다는 설을 믿으며 충격을 받았고,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뒤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고 한다. 결국 타국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강제로 결혼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이혼당하고, 딸까지 자살하고,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화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이유는?

다큐멘터리에서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광경이 나왔는데 '아기씨'라 부르며 덕혜옹주를 마중하는 상궁들의 모습이 깊게 각인됐다. 당시 50대 중반에 다다르는 할머니가 된 상궁들이 과거 궁에서 입던 옷을 차려 입고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 장면이 특별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다시 만난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거 같다. 나도 잘 몰랐는데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다시 만나거나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과정이 등장한다. 결국 <덕혜옹주>를 통해 세월을 두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결국 영화를 만들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제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영화였는데 영화화하기 힘든 소재라는 반대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후에 <덕혜옹주>라는 소설이 나와서 읽어봤더니 (김)장한이랑 복순이라는 캐릭터를 극화시켜서 픽션을 만들었더라. 그리고 덕혜옹주의 내면을 많이 투영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출판계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이라 했다. 아무래도 주류소설이 아니었으니까. 당시에 화제를 모은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죽이기 위해 삼성에서 사재기를 했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다. 어쨌든 소설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이 정도까진 각색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영화화를 반대하는 의견은 대체로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덕혜옹주가 잘 알려진 위인도 아니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여겨질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결국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다가 여자 주인공이라 투자자들에게 강한 물음표가 생겼던 거 같고, 그런 물음표를 지우는 게 쉽진 않았다.

연출작 가운데 첫 번째 12세 관람가 영화다.

그런가? <8월의 크리스마스>가 12세 관람가 아니었나?

아니더라.

아무래도 그 당시에 일부러 15세 관람가로 넘겼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이 작품이 멜로물이 아니란 것도 12세 관람가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수위 높은 애정신 자체가 등장할 가능성 자체가 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멜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소재였던 것 같은데 자제한 인상이었다.

사실 멜로로서의 가능성이 다분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고민하긴 했다. (김)장한이 일본에서 덕혜옹주를 데려오는 이유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고 초점을 맞추면 멜로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바탕의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런데 덕혜옹주를 데려오는 이유가 그렇게 보여선 안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한이 지닐 법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존중하고 관객도 그런 책임감을 크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멜로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촬영이 끝난 뒤에도 멜로처럼 느껴질 만한 부분은 걷어내 버렸다.

멜로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는?

지키고 싶은 선이 있었다. 덕혜옹주를 극화시키는 정당성이라고 할까. 멜로로 가져간다면 그 선을 넘어갈 것 같았다. 지나치게 극화된 느낌도 들고. 사실 박해일이 한번은 덕혜옹주와 김장한이 동침을 해야 말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래야 정한이 덕혜옹주를 한국에 데려오려고 애쓰는 걸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함께 겪었던 고난만으로도 충분히 재회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덕혜옹주가 해방된 지 17년이 지난 1962년에 귀국한 것이니 3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건데 이건 결국 민족적인 자존심의 문제에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 김장한에겐 덕혜옹주를 데려와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거다.

김장한은 실존인물이었지만 영화 속 김장한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 속의 김장한은 소설에서 가져온 인물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는 고종이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남자이기도 했다. 고종이 덕혜옹주의 짝을 빨리 점지해주고 싶어했다는데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서 백지화된 셈이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 했던 김장한에겐 김을한이란 형이 있었는데 신문기자였고, 김을한의 아내가 덕혜옹주와 학교 동창이었다고 한다. 결국 지금의 김장한을 완성하기 위해 그의 주변인물들을 끌어온 부분들이 있었다.

사실 실화를 바탕에 둔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도 처음이다. 소설을 허구의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만큼이나 사실에 대한 고증 문제도 중요했을 거 같다.

사실 김장한이란 인물을 언급한다는 건 실화에 기반을 둔 부분이지만 그가 정혼자로서 덕혜옹주를 찾아간다는 건 소설에서 빌려온, 명백한 허구다.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 사건을 다룬 부분은 완벽한 허구인데 실제 역사에선 영친왕과 관련된 극적인 망명 사건은 없었지만 그도 망명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선 영친왕이 상해를 여행 중일 때 망명을 권했다는데 영화에서처럼 폭파 작전과 연계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 속 시대가 이봉창 열사가 일왕 암살을 시도했던 시기와 맞물리기도 해서 덧붙여 각색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친왕의 망명 시도는 실제로 어땠는지 궁금하다.

영친왕이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망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영친왕도 고위직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영친왕이 망명을 고민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런데 당시 영친왕의 상해 여행 시점에 맞춰 망명을 도모했던 상해임시정부에선 영친왕이 일본인 아내와 이혼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일본인 아내를 데려가길 원했고 결국 망명을 거부했다고 하더라.

영화상에서 영친왕의 이미지는 유약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영친왕이란 인물은 열한 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실제로 일본사람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양아버지로 생각하고 따를 정도였고, 그의 제사에도 참석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영친왕의 처인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럼에도 영친왕 스스로가 조선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마지막 인간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친일을 했다기 보단 한 나라의 왕으로서 독립 이후의 국가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영화상에서 그린 망명 작전 신은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덕혜옹주는 영친왕에 비해 강인하게 묘사된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와 실화 사이의 줄다리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 중인 조선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극화된 장면인데 사실 친일을 옹호하는 버전의 신도 촬영했었다. 한택수(윤제문)에게서 어머니인 양귀인(박주미)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친일 연설을 하면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 뒤 덕혜옹주가 친일 연설을 하고 나니 한택수가 그제서야 사실 어머니가 죽었다고 전하는 시퀀스도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결과를 선택한 걸까?

최소한 덕혜옹주에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사실 영화상에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래서 '어쩌면 한 번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고 그런 장면을 연출했다. 아무래도 영화를 찍는 동안 극화된 인물이나 장면의 정당성과 개연성을 잘 설득하고 있는지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잘못하면 왜곡시켜버린 것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를 살피는 과정이 힘들었다.

모든 연출작을 통틀어서 액션신을 볼 수 있는 첫 작품이기도 하다.

<아저씨>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촬영감독인 이태윤이 <덕혜옹주>의 촬영감독을 맡았는데 내가 <외출>을 찍을 당시 촬영감독 조수였던 인연이 있었다. 아무래도 액션 연출에서는 기술적인 면이 중요한데 솔직히 이번 촬영을 통해 촬영감독과 미술감독에게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말이 되느냐'의 문제인데 액션 신에선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더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웃음) 예를 들어 김장한이 배에 총을 맞고도 나중에 막 뛰어다니는데 '총을 맞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웃음) 아무래도 그런 부분을 그냥 넘어갈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약 '저거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그리고 한택수가 배 위에서 총을 쏘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맞출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말이 되는 기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납득하는 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정상훈이나 라미란처럼 희극에 능한 배우들 덕분에 코미디물로서의 인상도 종종 느껴지는데 과거 인터뷰에서 코미디를 연출해 보고 싶단 말을 한 적이 있더라.

사실 웃음만큼 확실한 반응은 없다. 내가 영화를 재미있게 찍은 거 같다는 확신을 주는 반응이란.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만든 모든 작품에 웃음을 주는 요소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에 유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외출>로 함께했던 손예진과 11년 만에 재회했다. 그녀에게 예민하고 치열한 캐릭터를 입혀보고 싶단 생각을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외출>을 촬영할 때 감정에 깊게 빠져들어야 하는 신이 더러 있었는데 그때 힘이 있는 배우라고 느꼈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더욱 놀랍게 다가왔다. 집중력이라 할 수도 있고, 몰입도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연기적으로 강한 힘이 있는 배우라는 걸 알았다. 정말 그 인물이 돼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장에서 실제로 신기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덕혜옹주가 고국에 돌아가려다 실패하고 항구에 드러누워 미쳐버리는 장면을 찍을 때가 새벽이었고 굉장히 피곤한 순간이었다. '몹 신(Mob scene)'인데다가 촬영 여건도 좋지 않았고 당시 촬영을 강행하던 시점이라 배우 본인을 비롯해 스태프들도 굉장히 피곤한 상황이었는데 그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서 연기적인 집중력을 보여주니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덕혜옹주가 감정의 파고를 형성하는 역할이라면 김장한은 그 파고를 담고 견디는 둑 같은 느낌이다. 감독으로서 손예진이란 배우에게선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다면 박해일이란 배우가 감정적인 중심을 잡아주길 기대했을 거 같은데, 그만큼 박해일과의 소통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일단 (박)해일 씨와는 친하다. 막걸리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해일 씨도 좋아하고(웃음). <덕혜옹주>를 함께 하기로 결정한 뒤로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는데 그때 인사동에 있는 단골 막걸리집에 함께 자주 갔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본인 스스로 김장한이란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서로 툭툭 던지듯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인물을 매만졌던 것 같다. 결국 촬영을 시작하니까 박해일이란 배우 스스로 김장한을 만들어놓았더라. 매 촬영마다 미세하게 감정을 쌓아가는 게 보여서 정말 좋았다. 사실 감정을 표출해서 소진하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훌륭하게 해내더라.

특별출연 배우가 많은데 고수 같은 경우엔 극적인 비중이 상당하다.

사실 대부분 고수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이우 왕자는 실제 사진으로 봤을 때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고,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민족의식도 상당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존재감이 있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이우를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고수 씨가 이우와 닮았다. 그런데 고수 씨가 하게 돼서 개인적으론 참 좋았지.(웃음)

작년부터 일제강점기 시절을 배경에 둔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덕혜옹주>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웃음) 그냥 <덕혜옹주>만 두고 말해보자면, 사실 전작인 <위험한 관계>도 1930년대 상하이가 배경이니 <덕혜옹주>와 비슷한 시기를 배경에 둔 작품인 셈이다. 그 영화를 하면서 이 시대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덕혜옹주>를 일제 강점기 배경의 영화라고 정의하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영화의 주무대가 일본이기도 하고. 게다가 내가 <덕혜옹주>를 선택한 건 시대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대상황이 묘사돼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절이 그려진 것뿐이다.

혹시 막연하게라도 차기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면?

새로운 장르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다. 액션이나 코미디, 아니면 스릴러? 장르적인 작품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아니면 예전처럼 일상적인 영화를 다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덕혜옹주>를 만들었기 때문일까?

사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덕혜옹주>도 내가 해왔던 영화와 다른 느낌이니까 이젠 아예 완전히 다른 걸 해보면 어떨까 궁금하다. ■

사진_장성용

<모닝 캄>을 비롯한 다양한 매거진에서 풍경과 인물 사진을 찍어 왔고, 현재는 색다른 콘셉트의 베이비 스튜디오 그린비(http://www.studiogreenbee.com)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_민용준

영화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기자로 밥벌이를 시작하며 'beyond'와 'ELLE KOREA' 에디터로 잡지를 만들고 기사를 쓰고 다양한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를 해왔습니다. 주로 영화에 참견하고, 대중문화와 갖은 이슈에 종종 말과 글을 보탭니다. 한량의 삶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놀고 먹으며 즐길 수 있는 노하우를 탐색해 왔으나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결론을 얻고 나름대로 게으르게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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