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우린 소모품이 아니라 사람이다"

"기자님들 오시게 하려고 머리 밀었어요. 창피한 것보다 진실이 중요하잖아요. 4년 전 면접할 때 본부장이 제게 묻더군요.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있느냐고. 그땐 참을 수 있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성추행·성희롱은 관리자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일로 잘리면 다른 사람이 와서 또 그러고...."

  • 권석천
  • 입력 2016.08.17 06:10
  • 수정 2017.08.18 14:12

지난 일요일(14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건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선글라스와 반바지 차림의 여행객들 사이로 빨간 노조 티셔츠를 입은 50대 여성이 보였다. 공항 청소용역 노동자 Y씨. 그를 따라 청사 밖으로 나왔다. 청소용역 대기실은 3~4m 높이의 흰색 철제 가림막 너머 '여객터미널 리모델링 공사장' 안에 있었다. Y씨는 가림막 중간쯤에 달린 철문을 가리켰다.

지난겨울 이 철문을 용접했어요. 국회의원 차가 저기 귀빈실로 가는데 청소 카트 밀고 다니는 게 방해된다고 했나 봐요. 우리에게 말도 않고 이 문을 용접하니까 갑자기 출입구가 없어진 거예요. 퇴근도 못 하고... 높은 분들한테는 꿈쩍도 못하면서 우리는 사람으로 안 보는 거죠.

새 출입문은 귀빈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공사장 먼지 마시며 멀리 돌아가야 했고, 비라도 내리면 공사장 앞이 진흙탕으로 변해 카트 밀고 가다 넘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대기실엔 50대 여성 열댓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쓰레기통, 화장실, 대합실 바닥, 흡연실, 에스컬레이터... 그 넓은 청사 한 층을 두 사람이 나눠 맡아요. 출국장은 100L 쓰레기봉투 150개가 나와요. 비닐을 하나하나 봉투 안에 밀어 넣고, 검색대에서 뺐다가 다시 넣고... 손목부터 어깨, 허리, 무릎, 발목까지 안 아픈 곳이 없죠. 그런데도 미소 지으면서 일하라고 해요. 죽어도 미소가 안 나오는데....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이틀 일하고 하루 쉬어요. 저분은 88 서울 올림픽 때부터 일했는데 수십 년을 일해도 받는 돈은 다른 사람과 같아요. 시간당 최저임금 6030원. 오죽하면 이 더운 날, 일 끝난 뒤 샤워할 곳도 없겠어요.

더 참기 힘든 건 관리자들의 인격 모욕이에요. 여기 휴지 떨어졌으니 주워가라. 돈 많이 받으려면 좋은 대학 나와라. 커피 마신다고, 동료와 잠깐 얘기한다고, 걸려온 전화 받는다고 경위서 쓰게 하죠. 제사 있어서 연차 쓴다고 하면 카톡에 제사상 사진 올리라고 하고... 여길 왜 계속 다니느냐고요? 남편은 아프고, 아이들 공부시켜야 하고, 4대 보험도....

노조 결성을 하기로 한 건 지난 2월이었다. 지난해 말 용역업체에서 "내년 임금을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론 최저임금 상승분을 반영한 것임을 알게 됐다. "저들이 우리를 갖고 노는구나." 비밀리에 노조 가입 신청서를 받기 시작해 열흘 만에 103명을 모았다. 120명으로 노조가 꾸려진 뒤 설문지를 돌렸다.

'회식 때 나를 자기 무릎에 앉혔다. 어떻게 할 틈도 없이 혓바닥이 입으로 들어왔다.' '노래방에서 가슴에 멍이 들도록 성추행당했다.' '아무렇게나 주무르고 만졌다.' 노조 지회장 손경희(51)씨도, 다른 노조원들도 부끄러워 못했던 얘기들을 설문지에 쏟아냈다. 지난 12일 투쟁결의대회에서 삭발한 손씨는 후회는 없다고 했다.

기자님들 오시게 하려고 머리 밀었어요. 창피한 것보다 진실이 중요하잖아요. 4년 전 면접할 때 본부장이 제게 묻더군요.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있느냐고. 그땐 참을 수 있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성추행·성희롱은 관리자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일로 잘리면 다른 사람이 와서 또 그러고....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다. 시급 8200원에 상여금 400% 이내. 정부 지침을 준수하라는 것, 그리고 인간 취급을 해 달라는 것이다.

핵심은 낙하산이에요. 본부장·소장들이 한국공항공사에서 내려와요. 용역업체가 바뀌어도 본부장은 그대로죠. 그 본부장 위해서 회식하고 탬버린 두드리라 하고... 공사가 직접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달라질 게 없어요. 우린 더 이상 인권 유린당하면서 그렇게는 못 살아요.

그날 나는 그들을 오해했음을 고백한다. 공항으로 향하면서 우울한 표정들을 떠올렸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들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들은 쓰다가 버려지는 소모품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누이였고,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 살아서 숨쉬고 분노하고 맞서는 사람이었다.

김포공항 청소용역직원과 카트관리원이 조합원인 공공비정규직노조 강서지회의 손경희 지회장 등이 12일 오전 서울 강서구 한국공항공사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정부지침 준수'를 위한 파업투쟁 결의대회에서 삭발을 하고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권석천 #손경희 #노조 #김포공항 #청소 #용역 #사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