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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은 어쩌다 시장이 되었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2009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심각한 경제위기로 국가부도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고, 그나르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으로서 경제위기 원흉인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공연을 자주 가졌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들은 "차라리 니가 정치를 해 보라"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고, 그 말을 들은 그나르는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관공서에 가서 5천 크로나(약 5만원)를 내고 최고당을 창당해버립니다.

  • 와글(WAGL)
  • 입력 2016.08.09 12:26
  • 수정 2017.08.10 14:12

욘 그나르가 최고당 대표인 헤이다 헬가도티르와 함께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Brendan McDermid/Reuter

2009년 12월, 아이슬란드의 코미디언 욘 그나르(Jón Gnarr)는 '최고당(Best Party)'이라는 정당을 창당합니다. 6개월 뒤 치러진 선거에서 최고당은 놀랍게도 지지율 1위(34.7%)를 기록합니다. 1당이었던 보수성향의 독립당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수도 레이캬비크의 집권 정당이 된 것이죠. 동시에 욘 그나르는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최고당의 최우선 공약은 황당하게도 "공약을 지키지 않겠다"였습니다. 욘 그나르가 밝힌 최우선 공약의 선정 이유는 더 황당했습니다.

"최고당은 공약을 지키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른 정당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숨기는 것과 달리, 우리는 그것을 숨기지 않을 거니까요."

아이슬란드 경제 위기와 함께 등장한 '최고당'의 황당 공약

펑크 밴드 보컬, 배우이자 코미디언, 그리고 정치인... 욘 그나르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떻게 코미디언이 정치인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난독증과 학습장애를 앓았습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펑크 음악에 빠져 밴드 활동을 했고, 대학시험을 치르지 않은 채로 이런저런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며 20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현재의 부인인 요한나 욘스도티르(Jóhanna Jóhannsdóttir)를 만나 밴드를 결성해 본격적인 뮤지션으로 활동합니다. 동시에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 겸 배우로 활발한 방송활동을 벌여나갑니다.

그러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2009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심각한 경제위기로 국가부도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고, 그나르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으로서 경제위기 원흉인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공연을 자주 가졌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들은 "차라리 니가 정치를 해 보라"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고, 그 말을 들은 그나르는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관공서에 가서 5천 크로나(약 5만원)를 내고 최고당을 창당해버립니다.

욘 그나르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최고당의 공약과 비전을 담은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뮤직비디오 영상에는 수영장에 무료 수건 제공, 시내 동물원에 북극곰 유치, 디즈니랜드 조성 같은 최고당의 '황당 공약'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욘 그나르는 레이캬비크 시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위에서 공터를 향해 소리칩니다.

"우리는 어중간한 걸 거부합니다. 왜냐면 우린 최고니까요!"

이러한 욘 그나르의 외침은 기성 정치권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자 수준 높은 농담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가 진짜 시장으로 당선될 때까지는요.

최고당의 '참여형 선거운동'... 그 결과는?

2010년 5월 29일, 최고당은 3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레이캬비크의 집권 정당이 됩니다. 선거기간 내내 기성 정당과 정치권을 향한 장난과 조롱으로 일관했던 최고당이 창당 6개월 만에 그토록 큰 지지를 받은 사실은 정치인뿐 아니라 레이캬비크 시민들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시귀르다르도티르 아이슬란드 당시 총리는 "충격"이라는 한 마디 말만 남겼습니다.

레이캬비크 시청 집무실 책상에 앉은 욘 그나르. ©Vísir

경제 위기로 기성 정치권을 향한 불만과 분노는 여전히 높았지만, 정치 초짜에게 한 나라의 수도를 이끄는 역할을 맡겨도 되는 것인지 욘 그나르와 최고당을 향한 우려는 컸습니다. 그러자 욘 그나르는 (놀랍게도) 당선 후 진지한 태도의 취임 일성으로 시민들을 안심시킵니다.

"최고당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최고당은 가장 좋은 정당(the best party)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우리 당을 최악의 당, 나쁜 당으로 불렀을 겁니다. 우린 그런 정당이 되지 않겠습니다."

이 발언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욘 그나르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기성 정치권을 향한 조롱과 풍자 한편으로, 시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했습니다. 바로 온라인 공간을 통해서 말입니다.

최고당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더 나은 레이캬비크(Better Reykjavik)'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시민들의 정책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더 나은 레이캬비크'는 시민재단(Citizen Foundation)이라는 아이슬란드의 시빅 툴킷 제작 그룹이 만든 곳으로, 이용자들은 의견 교환과 토론 및 찬반표시를 거쳐 우선순위 의제 설정을 할 수 있습니다.

2016년 8월 현재, 전체 시민의 약 10%가 가입헤서 사용 중인 '더 나은 레이캬비크' 웹사이트

시민재단은 '더 나은 레이캬비크'에 지방 선거에 출마한 8개 정당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두었습니다. 대부분의 정당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거의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고당은 지지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더 나은 레이캬비크'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최고당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장난스러운 공약이 아닌) 진짜 정책을 선정하는 과정에 약 1,4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그나르 시장의 '시민참여형 시정' 들여다보기

최고당은 선거를 치른 이후에도 온라인을 통해 시민들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최고당은 사회당과의 연정을 구성하는 교섭 과정에서 '더 나은 레이캬비크'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교섭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공지했는데요, 그 결과 유효투표자의 10%에 가까운 5천 명이 넘는 시민이 웹사이트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욘 그나르가 시장으로 취임한 뒤, 레이캬비크 시는 '더 나은 레이캬비크'를 제작한 시민 재단과 공식적인 업무협약을 맺습니다. 2010년 이후로 '더 나은 레이캬비크'는 시의 공식적인 '참여형 시정' 창구가 되었고, 레이캬비크 시 의회는 이곳에서 시민들의 찬성표를 가장 많이 받은 10-15개의 의제들을 시의회에서 공식 발의해 토론과 표결에 부쳤습니다.

"우리는 게을리 일하지 않겠습니다. 결탁하겠습니다"라고 적힌 최고당의 선거홍보 포스터. 기성정치권을 풍자한 최고당은 집권 후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성공적인 시정을 펼쳤다 ©Besti flokkurinn

욘 그나르가 이끄는 레이캬비크 시는 단순 정책 선정뿐 아니라 예산 배정과 집행 과정에서도 온라인을 통한 시민들의 공개적인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9억 크로나, 우리 돈으로 약 100억 원 정도의 시 예산을 환경개선부문에 배정하고, 사업 선정은 '더 나은 레이캬비크' 플랫폼을 통해 시민들의 참여에 기반해 완전히 공개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욘 그나르는 4년 뒤 다음번 지방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밝은 미래당(Bright Future)'으로 이름을 바꾼 최고당 역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최고당의 뒤를 이어 집권한 사회당은 '더 나은 레이캬비크'를 계속 활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욘 그나르와 최고당이 문을 연 시민 직접 참여형 시정 운영이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2016년 8월 현재 '더 나은 레이캬비크'의 이용자는 전체 시민의 10%에 달하는 1만 5천여 명입니다. 2011년 이후 지금까지 약 3천여 개의 제안이 올라왔고 이 중 257개 제안이 시의회로 회부되어 최종적으로 165개가 공식적으로 시정에 반영되었습니다.

풍자 정당 '최고당'을 만든 욘 그나르의 교훈

레이캬비크 시청 앞을 지나가고 있는 욘 그나르 ©ALEX

욘 그나르와 최고당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정치인과 정당이 시민들을 동등한 정치적 행위자로 보고 시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때, 단순 지지 이상의 정치적 파워를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최고당은 권력 획득이 아닌 기득권 정치 비판과 정치권의 혁신을 원했기에,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물론 선거 이후에도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욘 그나르와 최고당은 집권세력이 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시정 운영 방식을 공식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는 '혁신'을 일구어냈습니다.

욘 그나르의 책 <나는 어떻게 아이슬란드의 가장 큰 도시 시장이 되었나>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고자 준비 중인 이미정 씨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최고당에서는 어떤 문제를 볼 때 이데올로기로 해석하거나 나누지 않아요. 좌가 옳다, 우가 옳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죠. 욘 그나르는 '함께 이루어간다'는 태도를 많이 보여줬어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결정을 내려나가는 그의 태도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그런 면에서 욘 그나르가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욘 그나르는 올해 초 대권 후보로 언급될 정도로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퇴임 후 그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는 최근 '시장(The Mayor)'이라는 아이슬란드 시트콤에 출연해 못된 레이캬비크 시장 역할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정치고 어느 것이 예술인지 이젠 헷갈릴 지경이지만,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여전히 '시장으로서의 그나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정치를 지켜볼 수 있게 된 셈입니다.

* 이 글은 정치 스타트업 와글주간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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