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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트랜스젠더 수퍼모델은 80년대에 아웃팅 당해 모든 걸 잃고 선구자가 됐다

  • 김도훈
  • 입력 2016.07.25 11:33
  • 수정 2016.07.25 11:34

라번 콕스와 케이틀린 제너 등 엔터테인먼트, 패션, 문화계에서 차장을 일으키고 있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있기 훨씬 전에 캐롤라인 코시가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1950년대에 태어난 코시는 트랜스젠더가 된다는 게 지극히 위험하고 커리어를 끝장낼 수도 있었던 시절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패션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쇼걸과 퍼포머로 시작한 코시는 ‘툴라’라는 이름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트랜스젠더임을 공개하지 않고 여성으로 살며, 코시는 제임스 본드 영화 ‘007: 유어 아이스 온리’에 출연하고 플레이보이 모델을 했다.

타블로이드 지가 코시가 트랜스젠더라고 아웃팅을 했고, 코시는 커리어에서도, 개인적인 삶에서도 모든 것을 잃었다. 아웃팅 후의 몇 년 때문에 코시는 “행동주의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영국 정부와 유명한 법정 싸움을 했다. “나는 여생 동안 수치를 느끼거나 사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허핑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코시는 트랜스 여성이자 모델로 지냈던 초기 시절, 아웃팅이 그녀의 삶에 미쳤던 영향, 오늘날의 트랜스젠더(특히 모델)들의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허핑턴 포스트: 당신의 커리어의 시작,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시작한 시점을 콕 집어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트랜스 모델, 배우, 엔터테이너가 되었던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꼽는다면?

캐롤라인 코시: 나는 너덧 살 때부터 전형적인 소년이라는 역할에 맞지 않았다. 내 오빠는 너무나 쉽게 소년 역할에 맞아 들어갔다. 나는 여동생과 더 동일감을 느꼈고, 소녀적인 것, 소녀들의 놀이가 더 편했다. 또 아주 소심하고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타서 더욱 힘들었다. 내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기엔 너무 어렸지만, 나의 모든 면, 내가 동일시했던 모든 것들은 다 여성적이었고 결코 남성적인 것이 없었다.

사춘기가 될 때 나는 여성이 아닌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편했다. 그게 어땠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문화에서 성장하는 게 어땠는지 하는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게이들은 대부분 비밀스러운 삶을 살았고,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배척당했다. 대도시 밖에서는 더 심했는데,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트랜스섹슈얼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런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대부분 섹스가 양극단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태어난 성기에 의해 성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 교육 시간에 배운 모든 것은 내 자신의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나빠졌다. 나는 내가 게이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나는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길러 여성스러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게이 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더욱 나빠졌다. 그리고 게이 섹스는 불만족스러웠다. 내 안의 필요와 정체성은 남성들이 나를 여성으로써 욕망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위치가 되었다. 이성애의 세계에도, 동성애의 세계에도 적응할 수 없었던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절망적으로 외로웠다.

나는 내 환경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찾아야 했다. 그 어느 곳보다 대도시가 내게 더 많은 희망을 주었지만, 대도시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안전한 곳인 내 가족을 떠나야 했다. 내 가족과 나는 나의 문제가 뭔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내가 늘 힘들고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내가 어지러움과 실신을 겪어 부모님은 나를 전문가들에게 데리고 가셨지만, 내게 아무 문제도 없고 점차 ‘철이 들 것이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나는 런던으로 갔고, 정말 운이 좋아서 같은 건물에 사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만났고 인생이 영영 바뀌었다.

다른 일부 트랜스 여성들처럼 당신은 젊은 시절 쇼걸 겸 엔터테이너로 일했다. 음악, 예술, 퍼포먼스가 당신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내가 모델, 엔터테이너, 배우가 된 것은 내가 런던에서 초창기에 극장 좌석 안내원으로 일한 것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아주 양성적인 모습이었는데, 한 안무가가 자신의 새로운 쇼의 쇼걸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고 접근했다. 나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처음으로 나는 여성으로서 일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트랜스나 남성으로 간주되지 않고, 나는 그냥 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내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지만 내 삶에 있어서 그 무렵은 엄청난 터닝 포인트였다. 3년 동안 춤을 추며 성 전환 수술을 받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모델을 하게 되었고, 배우 일도 뒤따랐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나를 규정한 순간이었다. 나는 목적과 방향을 찾았다. 나는 진정한 내 모습대로 살고 있었다. 세상은 나를 보통 여성으로 대했다. 처음으로 경쟁의 장이 공평해졌으며 인내를 갖고 노력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트랜스 여성으로서 성인이 된다는 경험은 어땠는가? 어떻게 대처했는가? 지역 사회가 어떻게 다르게 기능했는가?

안타깝게도 70년대와 80년대에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오명이 정말 많았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운 위치였다. 나는 눈에 잘 띄는 위치에서 일했다. 모델, 배우, 엔터테인먼트는 액면가나 퍼포먼스로 평가 받는다. 퍼포먼스나 완성품에서 예술가가 드러나거나 대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내겐 당시에는 그게 불가능했고, 당시의 주류 사회와 법칙이 트랜스젠더에 대해 무지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타블로이드는 내 커리어와 개인적인 삶까지 파괴할 수 있었다.

아웃팅을 당하자 나는 행동주의의 영역으로 몰리게 되었고, 영국 정부와 법적 싸움을 시작했으며 유럽 인권 법정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공개적으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을 참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여생 동안 수치를 느끼거나 사과를 할 생각은 없었으며, 다른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웃팅당하기 전에 본드 걸로서 처음으로 플레이보이 모델을 했고, 아웃팅 뒤에도 행동주의의 일환으로 다시 플레이보이에 등장했다. 90년대에 내 책, 플레이보이, 토크 쇼를 통해 인식을 끌어올린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흐뭇한 일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결코 내 커리어를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마치 카니발에 나가는 것 같았다. 당시 사회는 그 정도로 진보하지 못했다.

트랜스젠더 및 비관행적 젠더 모델들을 공개적으로 포용하기 시작한 현재의 패션계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

현재 사람들이 마침내 트랜스젠더 모델들을 포용하는 것을 보면 정말 좋다. 우리 모두는 놀라우며 단 하나뿐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그걸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나는 내가 트랜스젠더 가시성, 인식, 수용을 높이는데 내 몫을 했다는 게 자랑스럽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견뎌내기는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거나, 삶의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보람이 있다.

캐롤라인 코시가 어떤 업적을 남겼으면 하고 바라는가?

노포크에서 괴롭힘 당하고 소외 받고, 조롱 당하며 무력감을 느꼈던 어린 소녀였던 내가 여성으로서 당당히 일어서고 인정 받고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게 내 업적이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견뎌야 할 모든 일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아무도 그 힘을 빼앗을 수는 없다. 잠시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당신에게 그런 힘이 없다고 믿게 될 수 있지만, 그 힘은 언제나 존재한다.

허핑턴포스트US의 This Trans Supermodel Was Outed In The ‘80s, Lost Everything And Became A Pioneer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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