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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나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중증장애인 정수연 씨의 '자립생활 체험'

불안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난 37년간, 수연 씨와 부모님은 '삼위일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공기처럼 그의 곁을 지켜왔다. 어머니 순이 씨에게 힘들지 않았는지 묻자 "힘든 줄도 모르고 부모니까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키웠지"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혼자 힘으로 앉아있을 수 없는 수연 씨는 침대형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휠체어가 생기기 전에는 부모님이 수연 씨를 업고 다녔다고 했다. "돈이 없으니까, 이런 휠체어가 다 뭐야. 아무것도 없었지. 업고 진짜 온갖 데를 다 돌아다녔어."

  • 비마이너
  • 입력 2016.07.22 05:57
  • 수정 2017.07.23 14:12

수연 씨를 처음 만난 곳은 노들장애인야학이었다. 열아홉 살인지 서른아홉 살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침대형 휠체어에 늘어지듯 누워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건넨 인사에 답을 했지만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반으로 감기듯 휘어지는 눈과 목소리에 반가운 감정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 '비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수연 씨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알고 보니 수연 씨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눈꺼풀이 전부이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돌아가서, 눈을 보고 이야기하려면 말하는 쪽이 수연 씨의 고개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음식물을 씹지는 못하고, 삼키는 것만 가능하다.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연 씨는 '최중증 장애인'이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바라듯, 수연 씨도 '자립'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즈음부터라고 한다. 수연 씨는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수연 씨의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물을 마시는 것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다,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연 씨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수연 씨가 자립생활 체험 첫날 한 것은 새 옷 사기. 자기가 원하는 옷을 오 분 만에 골랐다. 평소 어머니가 입혀주던 원색 계열의 옷이 아닌, 무채색 계열의 바지를 샀다. ⓒ박임당

# '셋이서 한 몸'이 되어 살아온 37년

이 불안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난 37년간, 수연 씨와 부모님은 '삼위일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공기처럼 그의 곁을 지켜왔다. 어머니 순이 씨에게 힘들지 않았는지 묻자 "힘든 줄도 모르고 부모니까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키웠지"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혼자 힘으로 앉아있을 수 없는 수연 씨는 침대형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휠체어가 생기기 전에는 부모님이 수연 씨를 업고 다녔다고 했다. "돈이 없으니까, 이런 휠체어가 다 뭐야. 아무것도 없었지. 업고 진짜 온갖 데를 다 돌아다녔어."

힘든 줄도 몰랐다고, 순이 씨는 사뭇 의연하게 말했지만 수연 씨의 아버지인 종훈 씨는 "애 엄마가 고생 많이 했지"라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수연 씨가 7, 8살쯤이던 때 시설에 맡긴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아내인 순이 씨)가 수연이 없이 혼자 울면서 집에 들어오는 거야. 저기 구로 어디에 맡겨놓고 왔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데려온다면서. (...) 자기 나름대로 힘이 들었겠지...."

하지만 그 날 종훈 씨는 "러닝셔츠가 다 젖을 만큼 울면서 '따따블' 택시를 타고" 달려가 수연 씨를 데려왔다. 이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37년을 통틀어 수연 씨가 부모님과 가장 오래 떨어진 시간이었다.

"우리 수연이 같이 최중증(장애인)인 애들이 그런 데 가면 오래 못 살아. 한 방에 몇 명씩 있는 거를 선생 한 명이 보는데, 수연이처럼 언어가 잘 안 되는 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진득하게 듣고 있겠어."

종훈 씨의 입장은 단호했다. 남편이 일을 나가 있으면 수연 씨의 돌봄이 온전히 자기 몫이 되는 순이 씨도, 시설은 아예 선택지 바깥으로 밀어냈다.

이후, 수연 씨는 노들장애인야학에 다니게 되었다. 수연 씨의 오빠가 인터넷을 통해 알아왔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수연 씨를 업고, 순이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야학이 있는 언덕을 올랐다. 종훈 씨는 일이 끝나면 수연 씨를 데리러 왔다. 온 가족이 오직 수연 씨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 세 사람은 이렇게 '한 몸'이 되어 살았다.

수연 씨 때문에 노들야학에 매일같이 드나들던 순이 씨와 종훈 씨는 노들야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평등한 저녁식탁을 위해 급식을 시작한 노들야학에서 순이 씨는 요리를 했고, 투쟁 현장과 야학을 오갈 때나 탈시설을 결심한 사람들을 데리러 갈 때, 종훈 씨는 운전을 했다. 두 사람은 노들야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수연 씨와 부모님은 온종일 붙어있게 되었다.

수연 씨(맨 앞 휠체어에 탄 사람)가 노들야학에서 낮수업을 듣는 모습.

# '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그러나 이제는 그 불안감에 친숙해져야 한다

아직 활동보조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에, 아니, 그 이후에도 자주 순이 씨와 종훈 씨는 수연 씨의 손발이 된다. 하지만 엄연히 타인이자, 이용자의 의사가 서비스 제공의 최우선 기준인 활동보조인과는 성격이 현저히 달랐다. 두 사람은 수연 씨의 손발이었으나, '권위적인' 손발이었다. 수연 씨가 밥을 먹지 않으려 하면 억지로 입을 벌려서라도 밥을 먹이고, 물이 기도로 들어가지 않도록 수연 씨의 고개를 꺾었다. 세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폭력적'이라고도 생각할 만큼 거칠었다. 그러나 수연 씨와 부모님 세 사람의 관계를 익히 보아왔던 사람들은 선뜻 말릴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수연 씨의 건강과 생명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이가 바로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37년간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은 수연의 신변처리. 반찬을 씹지 못하니 잘게 자르고, 밥을 국에 적셔 무르게 만들고, 밤새 체위 변경을 하거나 손발을 마사지하는 일들. 이는 오롯이 두 사람만의 책임이었다. 언어장애가 있는 딸의 요구사항에 적응해 가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비로소 체득해온 과정을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 잘해낼 수 있음을 믿으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나밖에 못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오랜 시간 동안 밀도 있게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연 씨의 부모님도 안다. 이 불안감에 친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종훈 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우리랑 살 수는 없는 노릇이잖어.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힘이 없고, 언제 죽을지 몰라. 그런데 갑자기 우리 죽고 나서 수연이 혼자 살아야 하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우리 살았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다만, 언어만 좀 더 잘 되면 좋을텐데..."

다행히, 수연 씨 곁에는 그의 자립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을 비롯한 야학 교사들과 수연 씨의 활동보조인들이 수연 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몹시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한 시간에 걸쳐 설득했다.

"그 때는 나도 흥분을 많이 했지.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애 끼고 살다가 나중에 기력 다 빠지고 더 이상 못 돌보게 되면 같이 죽을거냐'고 몰아붙이니까...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그때는 흥분해서 '그래, 내 자식 내 손으로 죽이고 나도 죽을거다' 했다니까."

늘 대대하고 꼿꼿하던 순이 씨는, 이 말을 하면서 기어이 눈물을 쏟아냈다. 오랜 설득 끝에, 순이 씨는 수연 씨의 '외박'을 받아들였다. 3월의 밤, 봄이 동터오던 날, 수연 씨는 생애 첫 외박을 했다.

이후 6월에는 조금 더 대담한 도전을 했다. 수연 씨는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간 종로구에 위치한 자립생활주택 '평원재'에서 자립생활 '체험'을 했다. 이번에 순이 씨는 첫 외박때만큼 극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활동보조 선생님들 우리 집에 불러서, 수연이 아침에 어떻게 해주면 되는지, 밤에 자기 전에는 어떻게 씻기는지 알려줬어. 그동안 해오던 방식대로 해야 수연이도 편하니까. 그래도 영 마음이 놓였던 건 아니야. 이제 빼도박도 못하니까 그냥 한 거지(웃음)."

수연 씨의 활동보조인은 자립생활 체험을 하면서 가장 중점으로 뒀던 것이 바로 '살아남기'였다고 했다. "어머님이 워낙 불안해하시니, 이번 자립생활 체험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는 못하고, 그저 수연 언니가 '살아남는 것', 그다음으로는 '몸이 아프지 않은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았어요." 외박을 하고, 4박 5일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수연 씨는, 죽지도 않았고 건강이 나빠지지도 않았다.

수연 씨(왼쪽 아래)와 아버지인 종훈 씨(왼쪽 위)가 노들야학 모꼬지에서 교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노들장애인야학

# 우리 모두의 일상을 위하여

수연 씨와 같은 중증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자립은 곧 '가까워진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의미한다. 이들의 자립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 특히 가족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토대를 만들어야 할까. 현재 수연 씨가 받고 있는 활동보조 시간은 301시간. 최중증 장애인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하루 열 시간 남짓 활동보조를 받는 것이다. 독거로 나오더라도 631시간이 최대다. 하루 평균 20시간 남짓이다. 이마저도 평일 낮을 기준으로 환산한 시간이다. 주말과 야간에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는 경우, 시간은 더욱 적어진다. 탈시설 장애인의 경우에는 한 달에 약 20시간을 추가로 지원받게 되지만, 재가 장애인인 수연 씨는 이를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수연 씨는 부양의무자인 부모님과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도 되지 못한다. 가족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자립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연 씨가 자립생활 체험을 하던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순이 씨는 "첫날에는 불안해서 잠을 못 잤지. 그런데 다음날 야학에서 보니까 멀쩡하더라고.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혼자 시장도 가고 밖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지"라고 한다. 수연 씨는 자립생활 체험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이 "밤에 늦게까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겁먹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누리는 삶. 이제는 모두에게 고르게 주어져야 한다. 이를 위한 수연 씨 가족의 두렵지만 설레는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

* 이 글은 <비마이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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