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그곳에 가면 어른이 된다

그 후로 포르노잡지를 가끔 샀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허슬러>도 사고, 북구의 포르노 사진집도 사 봤다. 고등학교 때에는 비디오도 샀다. 도시 전설처럼 떠도는, '세운상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샀는데 집에 가 보니 동물의 왕국이었다, 전원일기였다'는 말도 경험했다. 그런 영상은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가서 따지고 바꿔서 받아왔다. 겁은 많았지만 오기 같은 건 있었다. 막상 그들이 완력으로 끌고 가거나 했다면 겁이 나서 도망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욕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꿔주기는 했다. 세운상가라는 공간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

  • 김봉석
  • 입력 2016.07.07 10:25
  • 수정 2017.07.08 14:12
ⓒGettyimage/이매진스

청계천에서 처음 포르노잡지를 샀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포르노잡지는 그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반 아이들이 포르노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을 가지고 왔다.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을 교과서 사이에 끼워서 돌려봤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가지고 온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세아극장을 드나들면서 포르노잡지를 파는 노점을 계속 보게 되었다. 누군가 사는 것도 지켜봤다. 돈을 주면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누런 종이봉투를 가지고 왔다. 앳된 얼굴의 청년은 봉투 안을 슥 들여다보고는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호기심이 일었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도로에 멈춰 섰다.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저녁이었고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1층에 내려왔으니 이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포르노잡지를 파는 노점이, 손수레가 보였다. 친구 하나가 말했다. "살까?" 또 하나가 답했다. "그래, 사자." 적극성은 거기까지였다. 서로 쿡쿡 찔러대기만 했다. "네가 가 봐." "네가 가." 실실 웃으면서 서로 부추기기만 했다. 5분 정도였을까. 하지만 긴 시간이었다.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확 발동이 걸렸다. 소심했지만 뭔가를 저지를 때는 확 내질렀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내가 갈게."

노점으로 다가가자 지켜보던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험악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동네에서 수박이나 그릇을 팔아도 어울릴만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책 살래?" 나는 짧게 답했다. "<플레이보이> 주세요." 아는 게 그 정도밖에 없었다. 아저씨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그건 별로 재미없어. 더 재미있는 걸로 줄게." "뭔데요?" 아저씨는 씩 웃었다. 손수레 아래에서 어딘가에서 책을 하나 뺐다. 누런 종이봉투에 집어넣으면서 표지를 슬쩍 보여줬다. "<클럽>이다. 이게 훨씬 재미있어," 슬쩍 두어 페이지를 보여줬다. <플레이보이>보다 좋은가 하는 건 몰랐다. 사실은 <플레이보이>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없었다. 잘려진 낱장을 몇 번 보았을 뿐. 가격을 말했는데, 잘 생각나지는 않는다. 몇 천원이었을 거다. 흥정을 하고, 돈을 내고, <클럽>을 받아왔다. 처음으로 산 포르노잡지였다.

설렜다. <클럽>을 받은 직후부터,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드디어 포르노잡지를 샀다는 흥분만은 아니었다. 아세아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처음으로 이곳에서 뭔가를 했다는 기분이었다. 집과 학교라는 두 개의 공간만을 왔다 갔다 하고, 가끔씩 스크린에서 다른 공간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끼는 정도의 일상이었다. 영화는 언제나 잠시의 탈출이었다. 보고 나서 반추할 수는 있지만 스크린 앞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언제나 익숙하고 지루한 세상이었다. 세운상가라는 특이한 공간 안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었지만, <클럽>을 사면서 동질감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쾌감이었지만 매력적이었다. 찰나 어른의 기분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 후로 포르노잡지를 가끔 샀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허슬러>도 사고, 북구의 포르노 사진집도 사 봤다. 고등학교 때에는 비디오도 샀다. 도시 전설처럼 떠도는, '세운상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샀는데 집에 가 보니 동물의 왕국이었다, 전원일기였다'는 말도 경험했다. 그런 영상은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가서 따지고 바꿔서 받아왔다. 겁은 많았지만 오기 같은 건 있었다. 막상 그들이 완력으로 끌고 가거나 했다면 겁이 나서 도망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욕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꿔주기는 했다. 세운상가라는 공간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내 안의 음란마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음란마귀 #김봉석 #문화 #포르노 #세운상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