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WOMEN NOT OBJECTS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달린다. 달리는 동안의 즐거움, 한계를 너머 조금씩 더 나아가는 뿌듯함, 몸을 움직여 정직하게 땀 흘린 뒤의 상쾌함 등등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고 개인적인 성취감을 얻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살이 빠질 수도 있고 건강해질 수도 있지만 부차적인 거고, 그게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건 스스로를 위해서다. 여자들은 남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니다. 남자들이 여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런데 남성이 달릴 때는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 여성의 달리기는 남자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뻔하고 지겨운 주객전도라니.

  • 이옥선
  • 입력 2016.07.07 08:05
  • 수정 2017.07.08 14:12

구글에서 '설현 엘레쎄 광고'를 검색해 보면 '설현의 남심 저격 러닝'이라는 말이 보인다. 광고의 내용은 이러하다. 타이트한 레깅스와 짧은 탱크탑을 입은 설현이 달리고 있다.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 남자들이 품평회를 나눈다. "야 떴다 떴다 3시 그린 그린." "오 대박! 장난 아니다 진짜!"

이 광고는 뭐랄까, 좀 한심하다. 러닝웨어를 사도록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 즉 달리는 여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달린다. 달리는 동안의 즐거움, 한계를 너머 조금씩 더 나아가는 뿌듯함, 몸을 움직여 정직하게 땀 흘린 뒤의 상쾌함 등등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고 개인적인 성취감을 얻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살이 빠질 수도 있고 건강해질 수도 있지만 부차적인 거고, 그게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건 스스로를 위해서다. 여자들은 남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니다(달리기를 좋아하는 내 친구는 "난 달릴 때 최고로 못생겼어!"라고 외친 바 있다). 남자들이 여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런데 남성이 달릴 때는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 여성의 달리기는 남자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뻔하고 지겨운 주객전도라니.

남성이 하는 행동은 주체로서, 여성이 하는 행동은 객체로서 묘사되는 것. '성적 대상화'의 기저에 놓인 관습이다. 이것은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과 광고를 승인하는 사람들이 여성을 객체로 보기 때문이고, 또 여성을 객체로 보아온 관습에 의문 없이 따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고에서 여성을 대상화 하는 것에 반대하는 캠페인인 #womennotobjects 동영상을 보았다. 아무런 맥락 없이 여성을 섹슈얼한 대상으로 그린 광고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라는 게 얼마나 지독하게 뿌리내린 관습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 동영상의 마지막에는 이런 카피가 흐른다. "나는 당신의 엄마, 딸, 누이, 동료, 관리자, CEO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광고 효과를 놓고 보아도 이건 현명한 짓이 못 된다. 소비자의 절반은 여성이니까. 게다가 이런 접근법은 참으로 구시대적인 것이다. 최근의 트렌드는 펨버타이징femvertising(페미니즘+애드버타이징)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당신이 땀내 나게 운동하는 여자라면 엘레쎄보다는 아디다스나 나이키에 마음이 갈 것이다. 아디다스는 최근 < I'm here to create > 캠페인으로 터프하고 멋진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오직 스스로를 위해 운동하는 모습을 SNS의 형식을 가져와 신나게 보여주었다. 나이키우먼스는 "#오늘보다강해지다"라는 해시태그를 내걸고 더 강해지기 위해 운동하는 여성들을 힘차게 독려한다. 나이키 스포츠 브라 광고에는 WNBA 선수 스카일라 디긴스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나는 운동선수인 여성이 아니다. 나는 운동선수다."

펨버타이징 흐름의 원류는 아마도 도브의 <리얼 뷰티> 캠페인일 것이다. 2004년 대대적으로 시작된 <리얼 뷰티> 캠페인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인공적이고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여성 각자가 타고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자는 외침이었다. 광고, 영상, 워크샵, 책, 공연 등 다양한 채널로 전개된 이 캠페인은 수많은 유산을 남겼고, 여성에게 덧씌워진 여러 굴레에 대한 성찰과 항의가 폭넓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2013년 도브는 <리얼 뷰티 스케치>라는 광고로 칸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몽타주 요원 앞에서 한 번은 여성 스스로가, 또 한 번은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이 외모를 말로 묘사하게 한 뒤 그려진 결과물을 나란히 보여준다. 모든 결과에서, 여성은 자신의 외모를 실제보다 저평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광고였다.

P&G의 생리대 브랜드인 올웨이즈는 < 여자애같이 like a girl > 캠페인을 통해 '여자다움'을 멋지게 재정의했다. (국내에선 '위스퍼' 브랜드로 나왔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에게 '여자애같이 뛰어봐라' '여자애같이 던져봐라' '여자애같이 싸워봐라'는 주문을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연약하게 행동해 보인다. 그런데 진짜 여자애들에게 똑같은 주문을 하자,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뛰고 던지고 싸워 보인다. "언제부터 '여자애같이 행동한다'는 말이 모욕이 되었습니까? '여자애같이'가 놀라운 것들을 의미하게 합시다." 올웨이즈의 캠페인 슬로건은 "규칙을 새로 쓰다 Rewrite the rules"였고, 대단한 반향을 이끌어냈다. 앞서 말한 주객전도의 관습은 활발히 새로 쓰이고 있다.

펨버타이징은 고사하고 '여혐광고'가 지뢰밭처럼 펼쳐진 이 나라에서도 가끔은 여성을 진정으로 멋지게 그린 광고가 태어난다. 최근 본 한국 광고 중 <헤라- 서울리스타>편만큼 여성이 근사한 주체로 그려진 예는 없었다. 서울이 이렇게 멋있어 보이긴 처음이고, 한국 여성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힘 있게 그려진 것도 참으로 좋다. 그 매력은 남심 저격을 훌쩍 넘어서서 스스로 빛나고 있는데, 그 점이 이 광고를 독보적으로 만든다. 비주얼이 워낙 눈을 사로잡아 사람들이 이 광고의 카피는 잘 기억 못 하지만 "이 도시가 빛나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라는 말을, 이 척박한 곳에서 사는 우리 여성들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땀과 우리의 여자다움과 우리의 자신감이, 스스로를 빛나게 한다.

* 하퍼스 바자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성 #광고 #사회 #문화 #김하나 #펨버타이징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