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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가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죽은 자가 부활하는 기적의 나라

한국 언론에서 북한에 관한 (믿기 어려운) 보도를 내놓는다. 그럼 외신들이 '한국에서 이런 보도가 나왔다'며 인용 보도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던 것이 해외에서도 보도됐다는 사실로 인해 점차 신빙성을 얻는다. 대중매체 연구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메아리방(echo chamber)'에 비유한다. 폐쇄된 방 안에서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면서 점차 증폭된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돌아오는 기적이 여러 차례 실현됐다. 음란물을 유포하여 총살당했다던 현송월, 국정원이 처형됐다고 했던 리영길이 근래의 대표적인 사례. 여기까지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 김수빈
  • 입력 2016.07.04 12:05
  • 수정 2017.07.05 14:12
ⓒKCNA KCNA / Reuters

김일성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4년의 일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이 정보 보고를 가져왔다. 북한에서 김정일에 대한 저항운동이 시작됐다는 것. 외국 대사관이 밀집한 평양의 외교단지에 '김정일 타도하자'는 삐라가 뿌려졌다 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통일 부문을 담당하는 비서관은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해당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삐라의 출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 그러나 박 비서실장은 '이제 (저항이) 일어날 때가 됐다'며 듣지 않았다. 민정수석 측에서는 독일에서 나온 정보라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삐라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뿌린 것이었다. 심리전의 일환으로 뿌린 삐라의 내용을 독일의 한 군소 언론사에서 보도한 것.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안기부 삐라도 독일을 건너니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는 고급 정보가 된 것이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통일은 새벽처럼 온다", "북한은 길어야 3년" 등의 말들을 쏟아냈다. 정부의 대북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북 정보지.jpg 2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발견된 북한의 삐라

당시 통일 부문 비서관이 바로 나중에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정 전 장관은 6월 24일 한반도평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위와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때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건만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언론을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한국 언론에서 북한에 관한 (믿기 어려운) 보도를 내놓는다. 그럼 외신들이 '한국에서 이런 보도가 나왔다'며 인용 보도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던 것이 해외에서도 보도됐다는 사실로 인해 점차 신빙성을 얻는다.

대중매체 연구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메아리방(echo chamber)'에 비유한다. 폐쇄된 방 안에서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면서 점차 증폭된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돌아오는 기적이 여러 차례 실현됐다. 음란물을 유포하여 총살당했다던 현송월, 국정원이 처형됐다고 했던 리영길이 근래의 대표적인 사례. 동방에 있다던 프레스터 존의 나라가 알고보니 북한이었던 겐가.

네크로맨서 김정은.jpg

여기까지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정부의 대북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웃어넘기기 어렵다. 한국 정부가 대북 압박 일변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의 배경에 북한붕괴론이 자리하고 있다는 건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분위기가 미국과 중국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월례토론회에서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최근 미국과 중국의 학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북한붕괴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근거의 대부분이 한국을 출처로 하고 있더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현재의 분위기로 보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될 듯하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대북 정책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까? 문정인 교수는 그렇게 전망하지 않는다. 워싱턴의 외교 관계자 상당수가 북한이 곧 붕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외교 책사로 알려진 웬디 셔먼부터가 그렇다.

'북한이 곧 무너진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근거가 희박한 숙청설과 지도자의 건강 이상설(국정원은 김정은 주치의보다도 더 김정은의 건강을 염려하는 듯하다) 등등은 대부분 국정원에서 나온다. 국정원의 대북 정보 수집 능력이 근래에 심각하게 약화되었다는 지적과 그 원인에 대한 논의도 분분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국정원을 필두로 한 정부의 대북 정보 활용이 너무 '정치적'이라는 데 있다.

지난 4월의 20대 총선에서도 정부의 정치적인 북한 이슈 활용은 두드러졌다. 사전투표가 시작된 4월 8일에 해외 북한식당 종업원의 집단탈북이 (극히 이례적으로) '공식적'으로 발표됐고, 4월 11일에는 북한 정찰총국 대좌의 탈북 소식이 보도됐다. 사실 이 정찰총국 대좌의 탈북은 작년에 발생한 것으로 굳이 그 시점에서 공개할 이유가 없었던 소식이었다. '창조 북풍'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다.

무수단 발사 성공 직후 환호하고 있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이런 식의 정치적인 북한 활용은 문제점투성이다. 무엇보다도 이젠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다. 20대 총선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앞서 소개한 일화들이 보여주듯, 보다 합리적인 북한관에 기반한 대북 정책 수립을 방해한다. 이는 단지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가져올 악영향은 분명하다. 곧 무너질 정권과 굳이 협상을 할 이유는 없다. 대화는 계속 멀어지고 당면한 가장 커다란 과제인 북핵 문제의 해결 또한 마찬가지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전략적 인내'로 일관하고 한국이 대화를 원천 봉쇄한 사이 북한은 네 번째 핵실험을 끝냈고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무수단의 발사를 마침내 성공시켰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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