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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의 오랜 팬들에게 '디마프'는 각별하다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1) <디어 마이 프렌즈>와 노희경

이젠 이것도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한때 노희경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거나 제임스 조이스를 즐겨 읽는다는 말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 그렇게 난해하고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른 대중의 인기를 사는 대신 소수의 열광적인 인기를 얻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팬의 입장에선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던 것이, 그 시절에도 그에겐 에스비에스 <화려한 시절>(2001)과 한국방송 <꽃보다 아름다워>(2004)처럼 당당히 내세울 만한 흥행작이 있었다. 그럼에도 ‘노희경’이라고 하면 일정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갑갑할 수밖에. 눈에 보이는 사건과 외적 갈등들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동시대 한국 드라마들과, 인물의 내면 풍경에 집중하며 감정의 결을 따라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노희경 드라마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드라마를 안 보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런 장점을 설파하는 건 종종 예기치 않은 역효과를 불러오곤 했는데, 자칫 “보통의 트렌디한 드라마를 즐겨 보는 너와 달리 나는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이 살아있고 인간의 깊은 내면을 이야기하는 노희경 드라마를 좋아해. 그러니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한 취향을 지녔단다”라는 뜻으로 고약하게 오해받기 쉬웠던 게다.

상처를 후벼파던 드라마

물론 영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젊은 시절 노희경 작가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간의 상처를 직시하곤 했다. 내내 자식들 뒷바라지에 치매 걸린 시어머니 수발까지 하며 고생만 하던 엄마가 말기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내용의 문화방송 창사 특집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1996)이나, 70년대 달동네에 드리워진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비틀거리는 동네 건달과 술집 작부의 이야기였던 문화방송 <내가 사는 이유>(1997) 같은 초기작은 노희경 작가 자신의 인생이 반영된 작품이었다. 그런 만큼 에누리도 이렇다 할 포장도 없이 날 선 시선으로 생의 피로와 그럼에도 살고 싶고 이해받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물군상의 심리를 묘사했다. 인물들이 자신을 보호하려 쌓아 올린 높은 마음의 벽을 넘어 제 상처를 이해해주는 이를 만나 치유받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먼저 묘사해야 했을 테니 일견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작품을 버거워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당장 내 삶도 힘들고 피곤해서 하루치의 수고를 티브이로 위로받고 싶은데, 가까이 다가가 만지면 손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처를 후벼 파는 드라마와 친해지기란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 그가 데뷔 11년을 맞이했던 2006년 한국방송 <굿바이, 솔로>를 쓰던 무렵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극 안에 미스터리 구조와 반전을 넣고, 여러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건을 전개하며 다중 스토리라인을 도입했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도 사용했던 내레이션을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작풍은 당시만 해도 미국 드라마를 위시한 영미권 작품들에서나 찾아볼 법한 스타일이었다. 그때 노희경 작가는 ‘10여년간 한국 드라마 업계가 나를 키웠으니 나도 이제 뭔가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이러한 변화를 설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나이가 확 내려가며 작품이 발랄해졌다. 물론 노희경 작가가 전작에서 청춘의 삶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청춘은 노희경 작가 자신의 청춘이나 당대의 청춘이 아니라, 70년대 달동네(<내가 사는 이유>)와 이태원(<화려한 시절>)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 세대’의 청춘 이야기였다. 한국방송 <바보 같은 사랑>(2000)은 고 박영한 원작 소설 <우묵배미의 사랑>(1989)을 드라마로 다시 만든 것이었고, 한국방송 <거짓말>(1998)이나 문화방송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1999)에서 묘사된 당대의 청춘은 젊되 발랄하다고 이야기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굿바이, 솔로>에서부턴 보다 더 가볍고 직설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제 삶을 둘러싼 온갖 우울을 힘차게 자전거를 지치며 돌파하려는 청춘들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거짓말>이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가 노희경 작가 본인 세대의 청춘 이야기였다면 <굿바이, 솔로>는 그보다 10년은 아래 세대의 이야기였다.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가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여전히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각자 숨기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심 토대였지만, 새로운 서사 구조를 시도함과 동시에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의 삶을 전면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굿바이, 솔로>는 의미심장한 분기점이었다. 그 무렵 창간되었던 대중문화 전문 웹진 <매거진 티(t)>와의 대담에서 노희경 작가가 한 말에서 이런 변화가 필요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나는 정말 가볍고 싶었어요. 진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내 드라마를 봤는데 사람들이 안 볼 만도 해. 마음이 퍽퍽한 거야.” 그러니 <굿바이, 솔로>에서 보인 변화는, 보는 이들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고 명징한 작품을 쓰던 작가가 보다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방법을 애타게 갈구한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그 뒤부터 노희경의 작품을 주변에 이야기하는 건 점점 쉬워졌다. 현빈과 송혜교를 내세워 방송국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한국방송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은 낮은 시청률에도 담백한 로맨스와 트렌디한 연출로 그 문턱이 대폭 낮아졌다. 제이티비시(JTBC) 개국과 함께 선보인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2011)는-안타깝게도 시청률은 여전히 낮았지만-정우성, 한지민, 김범이라는 스타 캐스팅과 김규태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영상미, 천사나 시간 회귀와 같은 판타지적 요소를 대놓고 작중에 등장시킨 과감한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노희경의 작품을 초창기부터 따라간 이들에게 그런 변화는 낯선 일이었다. 인물의 상처와 그 치유를 그리는 노희경 월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을 내면에 대한 탐구로 그려냈던 초기작들과는 달리 눈에 바로 보이는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외부 갈등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후기작들의 변화는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급기야 과도한 클로즈업과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 구성으로 윤여정으로부터 “저렇게 얼굴만 클로즈업할 거면 세트는 왜 지었다니”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던 에스비에스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나, 마음의 상처를 아예 정신질환의 형태로 정리해 외부로 꺼내어 보여준 에스비에스 <괜찮아, 사랑이야>(2014)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10년 수련 마친 수련인처럼

그렇게 불안해하던 이들이 안도와 환호로 맞이한 작품이 바로 2일 종영하는 티브이엔(tvN) <디어 마이 프렌즈>(2016)다. 이미 드라마 자체에 바치는 찬사는 많은 매체에서 무수히 냈으니 이 지면에서 ‘해는 동쪽에서 뜬다’처럼 당연한 찬사를 반복하진 않겠다. 마치 10년 수련을 마치고 하산한 무도인처럼, 지난 10년 새로운 서사구조를 실험하며 젊은이들로 가득한 트렌디한 세계에만 머무르던 노희경 작가는 그가 초기작에서 들여다봤던 부모 세대를 다시 찾아가 그들의 노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간 연마한 가볍고 발랄한 행마와 트렌디한 연출이, 특별한 중심 사건 대신 등장인물의 고단한 삶과 감정의 켜를 들여다보는 노희경 월드 본연의 서사구조와 만났다. 마침내 보는 이의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상처의 직시와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화법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희경의 오랜 팬들에게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우리는 젊은 시절 죽을 것처럼 치열하게 글을 쓰던 젊은 작가가, 제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격렬한 10년의 실험을 거쳐 큰 원을 그려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데뷔 21년, 마침내 노희경은 거장이 되었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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