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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노동자들은 브렉시트의 가장 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 허완
  • 입력 2016.06.30 11:31
  • 수정 2016.06.30 12:55

영국 국민투표 결과 ‘유럽연합(EU) 탈퇴’ 진영이 승리를 거둔 뒤, 많은 언론들은 영국 중하류층 노동자들의 선택에 주목했다.

각종 보도나 자료를 종합하면, 대체로 교육수준이나 소득이 낮을수록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비율이 높은 경향이 드러난다. 또 부유한 런던보다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에서 탈퇴가 더 높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브렉시트는 ‘불평등한 세계화’에 대한 ‘반란’인가

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에는 다양한 버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브렉시트의 승리를 세계화에 대한 반감이 힘을 얻은 결과로 해석하는 것.

이런 관점은 한 발 더 나아가 브렉시트는 ‘위험천만하고 어리석은 결정’이 아닌, ‘엘리트에 대한 용감한 반격’이자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비주류의 외침’이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진보진영 학자나 언론의 서술에서도 종종 이런 뉘앙스가 미묘하게 묻어난다. (물론 "영국 노동계급과 세계 노동계급의 일보 전진"이라는 적극 환영 논평을 낸 쪽도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는 브렉시트를 추동한 원인을 설명하면서 “‘과속 세계화’의 부작용”이나 “불평등 심화가 부른 세계화의 역풍” 같을 것들을 부각시켰다.

잉글랜드 북동부 해안도시 선덜랜드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 신문이 붙인 부제목에는 이들이 상정하는 일종의 대결구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영국 노동자들은 왜 탈퇴를 택했나

유럽연합 가입에 따른 수혜에서 소외

혜택은 일부 지역, 소수 부자들의 몫

한때 잘 나가던 노동자의 도시 선덜랜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며 투표 결과를 환영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인용하기도 했다. 선덜랜드는 탈퇴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61%) 지역이자, 잔류 측의 패배를 예고하는 첫 번째 승부처이기도 했다. 물론,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잃어버린 쇠퇴한 공업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게차 오퍼레이터인 마이클 웨이크(55)는 한때 조선소 그을음으로 검었던 로커 해변을 바라보며 “모든 산업이, 모든 게 사라졌다. 우리는 힘이 세고 강했다. 하지만 브뤼셀(유럽연합 본부)과 정부가 모든 것을 가져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켄이나 웨이크 같은 처지의 노동자 계층에게 브렉시트로 인한 금융시장 파동은 유럽연합 체제에서 떼돈을 번 ‘남동부 일부 지역의 일’이거나 ‘소수 부자들의 일’일 뿐이다. 오히려 브렉시트가 자신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줄 거라는 기대감도 번져 있다.

(...) 은퇴한 군 정비기술자 에드워드 페날(64)도 탈퇴에 표를 던진 걸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브렉시트로 인한 시장의 불확실성을 “유언비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나는 (닛산이 브렉시트로 선덜랜드와의) 관계를 끊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며 “파운드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겨레 6월28일)

브렉시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들일지도 모른다

닛산 선덜랜드 공장. ⓒReuters

그러나 이 지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표가 초래할 미래의 결과에도 계속 환호하게 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 일본 자동차 업체 닛산의 선덜랜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지역 최대 생산시설이자 영국 내 최대규모의 자동차 공장인 이곳에 구조조정의 바람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닛산은 38억5000만 파운드(약 5조9677억원)가 투자된 직원 6700명 규모의 이 공장에 브렉시트가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소문은 생산라인을 휩쓸고 있다.

성을 밝히기를 거부한 닛산 생산라인의 30대 노동자 스티븐은 브렉시트 투표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또다른 직원인 한 엔지니어는 “나는 잔류에 표를 던졌다. 탈퇴표가 그렇게나 많이 나온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걱정스럽다. 만약 영국이 정말 EU를 떠난다면 우리가 수출하는 대부분의 차량이 유럽으로 가는 상황에서 선덜랜드 공장이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모델의 생산물량을 우리 공장으로 가져오는 것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티븐은 노동자들이 이미 걱정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생산물량 확보를 위해 닛산-르노 얼라이언스의 다른 공장이 있는 지역과 끊임없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자신들의 공장이 물량 확보 경쟁에서 밀리면 일자리가 줄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먹구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파이낸셜타임스 6월28일)

닛산 선덜랜드 공장은 일본 자동차회사인 닛산이 1986년에 유럽에 처음으로 세운 생산시설로, 압도적인 1위의 영국 최대 자동차 공장이다. 영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3대 중 1대가 이 공장에서 나온다.

이 공장에서 지난해 생산된 47만6589대 중 약 55%인 25만여대는 무관세로 유럽에 수출됐다. EU 탈퇴로 무관세 혜택이 사라져 유럽 수출 물량이 줄어들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영국 전체를 살펴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 투표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경제 전문가들은 일차리 감소, 투자 저하, 경기침체 등 브렉시트 후혹풍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가장 먼저 거대 다국적 금융회사들의 이탈 가능성이 제기됐고, 영국 기반 다국적 통신사인 보다폰도 영국 본사를 옮길 가능성을 흘리고 있다.

그밖에도 수많은 서비스기업들과 영국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 기업들, 특히 이민자들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기업과 유럽과 거래 비중이 높은 회사들이 영국 내 일자리 축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가디언은 ‘브렉시트가 당신에게 의미하는 것’이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EU 탈퇴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들은 EU와 거래하는 서비스 분야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으며, 금융서비스, 관광, 자동차 제조업 분야는 브렉시트 이후의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적 기업들은 영국이 만약 EU를 떠난다면 투자처로서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건 영국에 진출해 영국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기업의 수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경기침체에 접어든다면 영국 회사들도 일자리 수를 줄일 것이다. 패스모션이 인사 관리자들과 대졸차 채용 상위 75위 경영자들을 상대로 실시해 지난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49%는 영국이 EU를 떠날 경우 채용규모를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탈퇴 투표 결과, 영국인들이 해외에서 일하기는 더 어려워질 게 거의 확실하다. EU의 일원으로서, 영국 시민들은 회원국 28개 중 어디서든 거주하면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영국인들은 거주나 취업을 위해서는 비자를 소지해야 할 것이다. (가디언 6월24일)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지향하는 '反금융세계화의 평등한 사회'는 멀고, 불투명한 전망이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공장이 떠나는 건 눈 앞의 현실이다. 가혹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건 언제나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의 고통은 영국이 EU 회원국이어서가 아니다

‘EU가 모든 걸 빼앗아 갔다’는 노동자들의 분노는 어떻게 봐야할까?

한겨레가 마저 소개하지 않은 뉴욕타임스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선덜랜드 시민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정반대 되는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가 유럽연합으로부터 큰 돈을 지원받은 도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산된 차량을 무관세로 유럽에 수출하는, 영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공장인 닛산의 공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30년 전 죽어가는 조선소의 노동자들을 채용했고, 유럽연합 회원국의 혜택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닛산은 브렉시트에 반대했다.

(중략)

조선산업의 많은 기술자들은 닛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은 (조선소 공장으로 인한) 그을음이 사라진 해변에 위치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계층상승을 누렸다.

그들에게, 그 가족들에게, 유럽연합은 매력적이었다. 그들은 올림픽 경기장 크기의 수영장을 갖춘 ‘선덜랜드 아쿠아틱 센터’에서 수영을 할 수 있다. 2000만 파운드(약 309억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는 유럽연합이 자금을 지원했다. 그들은 또 역시 유럽연합의 자금지원을 받은, 매끈하고 모던한 ‘선덜랜드대학’ 캠퍼스로 자녀들을 보낼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자금은 소프트웨어 기업가들에게 지원과 조언을 제공하는 ‘선덜랜드 소프트웨어 시티’에도 투입됐다.

그러나 이 화려한 프로젝트들은 많은 선덜랜드 노동자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많은 사람들은 매월 30파운드의 아쿠아틱 센터 요금을 감당할 수 없고, 워싱턴 지역(닛산 공장 인근 외곽지역) 인근 주민들은 한 번도 그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선덜랜드대학의 경우, 최근 영국 정부가 인상한 등록금은 젊은층에게 너무 비싸다. (뉴욕타임스 6월27일)

EU가 영국 경제, 특히 대다수 노동자들의 경제적 상황에 미친 영향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EU를 벗어나면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

냉정하게 따지자면, 영국 노동자들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공공지출 삭감, 각종 수당 및 복지 축소 같은 긴축정책이다. 지난 몇 년 간 이런 조치들을 시행해온 건 EU가 아니라 보수당 정부였다. (EU가 긴축을 강요한 곳은 영국이 아니라, 그리스 같은 남유럽 ‘적자 국가’들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제2의 대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가혹한 긴축을 시행했다. 파업 요건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영국판 노동개혁법’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로 유명했던 대처의 노동개혁을 잇는, ‘30년 만의 가장 강력한 노동개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맥락에서 ‘EU 그 자체가 아니라 영국 정부,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 긴축을 강요하는 EU 집행부가 문제’라는 건 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 당수가 EU 잔류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9일 BBC ‘앤드류 마 쇼’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민자수 상한선과 노동력 이동의 자유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EU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한다는 것은 (EU 전체) 경제를 조화롭게 운영해 (모든 회원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스에 대한 유럽연합의 끔찍한 대접, 특히 유럽중앙은행과 유럽연합의 행동이 바로 문제인 것입니다. 남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빈곤수준을 높이면 다른 곳(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민자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이건 유럽 전역에서 성장정책으로 통하는 긴축에 반대해야 할 문제이지, 이민자를 규제할 문제가 아닙니다.”

“극우 정치세력들이 어젠다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나이젤 파라지(영국 독립당 당수, 탈퇴 진영) 같은 사람들이 붙인 끔찍한 포스터를 보세요. 전쟁에서 탈출하는 수많은 절박한 사람들의 사진을 놓고는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러 온다’고 말합니다.”

“(반이민 정서에 동조하는) 유권자들이 인종주의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 말은, 이건 영국 정부가 지방 당국에 자금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건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하지 못하는 정부 정책의 실패이고, 20년, 30년 만에 처음으로 학교 예산을 깎으려는 정부의 실패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문제인 것이고, 유권자들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이 (보수당) 정부와 지난 6년 동안 긴축을 밀어붙여왔던 캐머런 총리와 오스본 (재무장관)이라는 것입니다.”

코빈은 이어 “우리가 EU를 떠난다 해도 똑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일자리의 상당수는 유럽으로의 수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가 격변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매우,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브렉시터’들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적’에게 돌렸다

다시 선덜랜드로 돌아가보자. 앞서 소개한 뉴욕타임스 기사의 일부다.

1988년, 보수당 정권을 이끌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선덜랜드 위어강에 남아있던 마지막 조선소의 문을 닫아버렸다. 유렵연합은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금으로 4500만 파운드(약 696억원)를 지원했지만, 선덜랜드는 한 번도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실업률은 영국 내 최고수준인 9%에 달한다. (뉴욕타임스 6월27일)

전통적으로도 금융강국이었던 영국은 제조업을 사실상 포기하고 ‘금융세계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진 국가 중 하나다. 그 명암은 분명하다. 런던은 미국 뉴욕과 함께 전 세계 금융중심지로 꼽히지만,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지방도시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덜랜드가 바로 그 ‘쇠락한 지방 공업도시’들 중 하나다.

이같은 오래된 ‘지역간 빈부격차(불평등)’가 국민투표 결과로 드러났다는 해석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구체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잔류를 선택한 런던, 고학력·고소득층과 탈퇴를 선택한 지방, 저학력·저소득층 사이의 간극은 분명하다.

물론 EU 탈퇴에 찬성했던 이들의 정체성을 한 묶음으로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중에는 궁핍한 노동자도 있고, 과거의 향수에 젖은 노년층도 있으며, 지독한 민족주의자들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좌파’들도 있고, 애초부터 EU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으며, ‘대처 이전의 복지국가’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번 투표에서 가장 큰 정치적인 승리를 거둔 세력 중 하나가 바로 극우성향의 영국독립당(UKIP)이라는 사실이다. UKIP의 당수 나이젤 파라지는 끊임없이 ‘이민자를 쫓아내자’거나 ‘위대한 우리의 영국을 되찾아오자’는 구호를 외쳤다. 탈퇴 진영의 주장과 구호는 이들이 거의 독점했다.

이 내러티브는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내 일자리가 사라지고 수입이 줄어드는 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유입돼 수많은 일자리를 먹어치우는 이민자들과 영국 시민들이 낸 세금을 엄청나게 가져가면서도 ‘우리의 주권을 제약하는’ 유럽연합 탓이라는 것. 따라서 이민자를 쫓아내 일자리를 되찾고, EU에 상납하던 돈을 가져와 ‘영국인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것.

(이들의 주장은 여러 측면에서 트럼프와 매우 비슷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번 투표 결과에 ‘전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장이 정체되자 일자리가 줄고 지갑이 얇아진 시민들은 ‘내것을 빼앗아 간’ 이방인들과 기득권층에 화살을 돌린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붐을 일으키고 필리핀에서 과두제 가문정치에 맞선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독일에서 극우파들이 난민촌에 불을 지르며 수시로 실력행사를 벌이는 상황, 그리고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은 모두 이어져 있다. (경향신문 6월26일)

이런 극우 정치인들의 선동에는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 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표 이후에도 영국에서는 인종혐오성 공격이 급증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고, 나이젤 파라지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유럽의회 의원들을 조롱했다.

‘진보’가 기억해야 할 브렉시트의 진정한 교훈

이런 점에서 ‘진보’가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환호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오히려 긴장하고 경계해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크고 무거운, 그러나 제대로 다뤄내지 못했던 과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진보의 ‘존재감 제로’ 상태가 역설적으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진보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건 분명히 합시다. 세계경제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에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경제 모델은 경제 엘리트들이 이득을 취하도록 그들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진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수많은 (EU) 탈퇴 운동가들이 내걸었던 선동, 편견, 반(反)이민 정서에 기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핵심적인 도널드 트럼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세계인들을 더 가깝게 이끌 국제적인 협력을 힘차게 추진하고, 극단적민족주의를 축소시키며, 전쟁 가능성을 낮출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존중하고, 월스트리트(금융가)나 제약회사, 그밖의 거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 만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을 지키는 경제를 위해 싸울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중략)

도널드 트럼프가 영국의 다수 브렉시트 지지자들을 부추겼던 똑같은 힘에서 이득을 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미국 민주당에게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수많은 미국 유권자들도 탈퇴를 지지했던 영국인들처럼 중산층을 파괴한 경제세력들에 분노하며 좌절하고 있습니다.

이 중차대한 순간을 맞아 민주당과 민주당의 새 대통령은 고통받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소수의 억만장자들이 아닌, 모두를 위한 국가경제와 세계경제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 6월28일)

버밍엄대 마틴 파월 교수는 29일 발행된 한겨레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노동당은 원래 노동계급과 취약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유럽연합 잔류를 선택한 노동당과 달리, 노동당이 대변한다고 말하는 이들 대부분은 유럽연합 탈퇴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지난 총선 결과를 보여주는 지도를 보면, 노동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런던과 주요 대도시들이다. 대도시에서 교육 수준도 높고, 생활 수준도 중간 이상인, 진보적인 일간지 <가디언>을 읽는 중산층이다.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인 노동계급이 과거만큼 노동당을 ‘나의 정당’으로 지지하는지는 의문이다. 노동당과 거리가 멀어진 이들은 새로운 메시지에 이끌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자리를 극우정당이 채우고 있다.” (한겨레 6월29일)

이것이 (특히 좌파들에게) 위기의 신호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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