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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Brexit)라는 극단적 선택은 극단주의자인 도날드 트럼프에겐 복음이다. 트럼프는 "다른 곳에서도 국경선과 통화정책을 되찾으려 하는 이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자본주의를 출산한 영국과 종주국인 미국이 고립주의에 앞장서면서 자기 손으로 구축한 세계화와 개방주의, 자유무역을 파괴하려는 역설이 현실이 됐다. 엔저로 버티는 일본의 아베노믹스는 브렉시트 이후 안전자산인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 이하경
  • 입력 2016.06.30 10:11
  • 수정 2017.07.01 14:12
ⓒASSOCIATED PRESS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1922~2010)의 생애는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조선소 노동자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항공대 490폭격비행단의 폭격수로 베를린·체코·헝가리 상공을 누볐고, 프랑스에서는 네이팜탄까지 투하했다. 전역해서 27세에 공부를 시작해 대학교수가 된 뒤 흑인 인권과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상징이 됐다. 백인 지식인으로 차별받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투옥과 해고를 감수했다.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조지아주의 흑인 여자대학인 스펠먼 대학 교수였던 그는 캠퍼스를 둘러싼 높은 석벽과 철조망의 용도에 의문을 품었다. 구조물이 외부 침입 방지용이 아니라 학생들을 못 나가게 하는 통제 장치라는 불편한 진실이 양심을 깨웠다.

1956년의 일이었다. 차별받는 흑인 여학생들의 편에 서서 싸운 백인의 이름이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가 됐다. 94년에 쓴 자전적 역사 에세이의 제목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였다. 불의를 알면서 편승하면 공범이 된다는 것을 알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라는 실천적 지식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포함한 비판적 언론은 미국 주류의 일탈을 견제해 왔다. 하지만 그런 미국의 시스템도 극단주의의 도전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세계에서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가 돼버린 미국의 '화이트 푸어(가난한 백인)'는 도널드 트럼프를 중심으로 뭉쳐 미합중국의 기존 가치를 전복시킬 기세다. 

이 와중에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Brexit)라는 극단적 선택은 극단주의자인 도날드 트럼프에겐 복음이다. 트럼프는 "다른 곳에서도 국경선과 통화정책을 되찾으려 하는 이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자본주의를 출산한 영국과 종주국인 미국이 고립주의에 앞장서면서 자기 손으로 구축한 세계화와 개방주의, 자유무역을 파괴하려는 역설이 현실이 됐다. 엔저로 버티는 일본의 아베노믹스는 브렉시트 이후 안전자산인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과 대치 중인 푸틴은 적진의 균열로 한숨을 돌렸다. 시진핑의 사정도 복잡하다. 영국을 통한 미국의 유럽 컨트롤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중국 봉쇄가 실제 목적인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전략'(Pivot to Asia)이 흔들려 안보적으로는 유리하게 됐다. 하지만 EU의 균열과 침체로 인한 수출 감소는 악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장면은 유럽과 미국, 아시아가 너나없이 브렉시트의 후폭풍에 휘말려 가는 문명사의 강력한 지각변동이다. 문제는 남을 걱정할 정도로 한국이 한가하지 않다는 점이다. 개방주의와 세계화·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 세계'의 최대 수혜자인 한국엔 힘센 파트너들이 한꺼번에 몸살을 앓는 상황은 불길하다. 유럽에서 수출 침체를 겪게 될 중국이 한국으로부터 중간재 수입을 줄이는 순간 내수와 고용이 바닥을 친 한국 경제는 최악의 3중고를 겪게 될 것이다. 

한국에 비관적인 신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양극화의 속도를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총선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은 브레이크 없는 양극화에 분노한 민심이 기성 정치에 경고를 날렸기 때문이다. 여야 3당의 김종인·정진석·안철수 대표가 입을 모아 양극화 해소를 외친 것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탓이다. 하지만 성장이라는 대전제 아래 고용과 분배·복지를 확대하고 저출산을 해결할 의지와 실행력을 갖춘 위기관리 컨트롤타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소득 격차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심각하다. 그래서 경제학자와 관료들은 저소득층의 높은 한계소비 성향에 주목해 왔다. 평소에 잘 먹고 입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부자와 달리 돈이 생기면 쓴다. 아니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는 소비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한다면서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주는 정책을 한다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효과는 전혀 없었는데 그걸 따지는 사람조차 없다. 그렇게 탄탄했던 영국과 미국의 중산층도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그렇다면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거부하는 최악의 상황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한국에는 폭주기관차가 달리고 있다. 아무리 돌아봐도 돈 많고 힘센 기득권층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 정치 리더십은 여기에 적당히 올라타 있다. 말로는 양극화와 저성장이 문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배를 채우느라 남의 고통은 외면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의와 양심이 고장 나고 민주주의와 관용이 무너진 극단주의의 세계를 선포하는 폭주열차를 멈추게 할 리더십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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