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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남자, 모르는 남자

사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수준의 여성폭력이나 성폭력 범죄는 거의 대부분 아는 관계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주로 여성의 사회경제적 낮은 지위, 오랫동안 문화 속에 자리잡혀온 여성혐오, 성역할이나 '남자다움/여자다움'에 대한 경직된 신념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범죄불안은 모르는 남성에게만 집중된다. 아는 남성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기대하고, 모르는 남성은 가해자로 규정함으로써 두려워하고 심지어 혐오한다.

  • 권인숙
  • 입력 2016.06.29 12:54
  • 수정 2017.06.30 14:12
ⓒGettyimage/이매진스

드라마 <또 오해영>이 인기다. '재미있으면 됐지!'라며 좀 거슬리는 설정에도 관대해지지만 몇 장면은 쉽게 넘겨지지 않았다. 오해영이 혼자 있는 것을 안 중국집 배달원은 당장 눈빛이 변하고 사장에게 퇴근하겠다며 전화한 뒤 거스름돈을 핑계로 다시 오지만,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 오해영을 구해준다. 얼마 후 밤길을 걷던 오해영은 치한에게 당할 뻔했으나 남자 주인공이 또 구해준다. 로맨스를 위한 설정이겠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여성이 한 달도 안 되어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할 뻔하다니! 물론 오해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취방에 남자 신발을 가져다 놓는 방법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가뜩이나 적지 않은 성폭행 공포를 가졌을 혼자 사는 많은 여성들은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불안을 더 현실적으로 체감하며 키우겠구나 싶었다.

강남역 사건을 겪으면서 다른 많은 문제의식에도 공감하였지만, 성폭행 불안에 덧붙여 이제는 여성들이 묻지마 살해 공포와 더 강화된 화장실 공포까지 가지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온갖 여성안전정책에 이제는 의경버스에도 '여성안전'이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는 세상이 되었다. 여성의 범죄 불안은 공공기관이 풀어야 할 이슈가 되었지만, 그만큼의 범죄 불안을 가지는 것이 타당한지는 논하지 않는 것 같다.

미디어의 지배력이 큰 세상에서 범죄의 공포는 범죄만큼 많은 문제를 동반한다. 범죄율이 떨어져도 엽기적인 몇 개의 범죄사건 보도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고 사람들은 그 공포에 집중하느라 많은 것을 간과한다. 간접 범죄경험과 범죄정보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여러 상황과 공간에서 범죄를 연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쩌다 공원에서 살인사건이 한번 발생해도 뉴스만 타면 그 공원은 한동안 아이와 여성은 갈 수 없는 곳이 된다. 유괴사건 한두 가지만 집중 보도되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사라진다. 강력범죄에 쏠린 시선과 불안은 가난, 실업, 고용, 복지와 같은 중요 문제에 대한 시선을 빼앗는 용도로도 많이 쓰인다.

여성범죄불안은 더 복잡하다. 사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수준의 여성폭력이나 성폭력 범죄는 거의 대부분 아는 관계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주로 여성의 사회경제적 낮은 지위, 오랫동안 문화 속에 자리잡혀온 여성혐오, 성역할이나 '남자다움/여자다움'에 대한 경직된 신념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범죄불안은 모르는 남성에게만 집중된다. 아는 남성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기대하고, 모르는 남성은 가해자로 규정함으로써 두려워하고 심지어 혐오한다.

여성이 불안에 떨고 아동 수준의 특별보호가 필요한 대상이 되는 사회일수록 남녀의 성역할 고정관념과 차별은 더 커진다. 무엇보다 극화되거나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극단적인 사건에 집중되어 형성되는, 모르는 남성과 관련된 여성범죄불안은 대부분 대책이 없다. 혼자 사는 것을 포기하고, 생활 반경을 좁혀 모르는 남성과 접촉면을 줄이고, 화장실을 떼지어 다니는 것 말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범죄불안이 높은 사회의 여성은 오히려 자기방어는 믿지 않는다. 여성은 약자라는 의식이 커, 스스로 보호하고 대응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공공기관의 대책도 그렇다. 여성범죄불안은 사실 근본적 해결책이 별로 없기에 늘 미시적·전시적 대응책에 머문다. 여성 안심 정거장, 안심귀가 서비스 등은 이용률이 적을 수밖에 없는 전시형 정책이다. 여성 주차장이나 여성 지하철칸 같은 분리보호정책은 실효성도 약하고 여성이 특혜라도 받는 듯한 착시효과로 사회 분열만 일으킨다. 여성 안심 택배나 여성 안심 벨 정책(공중화장실 벨 설치) 같은 것은 맞벌이 부부나 노인들도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이다. 대부분의 안전정책은 여성을 굳이 붙이지 말고 지역안전 서비스나 지역환경 개선에 수렴되는 것이 더 정확하고 방향성이 잘 잡힐 수 있는 정책들이다.

여성은 늘 범죄불안에 떨어야 하나? 강남역 사건같이 여성혐오가 정신병과 합쳐져 '묻지마 살해'로 이어지는 사건은 상대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까지 갖고 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도 불안하면 자기방어를 배워 내 몸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이와 함께 주변의 아는 관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의 젠더폭력의 원인과 대응에 관심을 쏟는 것도 막연한 불안에 휘둘리지 않을 나은 방법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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