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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결혼 1년 :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J. Scott Coatsworth

미국 대법원이 결혼 평등 판결을 내린 지 1년이 지났다. 나는 그 날에 영감을 받은 문집 '더 완벽한 결합'에 참가한 것이 자랑스럽다. 이 문집에 싣기 위해 내 이야기를 쓰다 보니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얻었다... 이제는 뭘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나?

1992년 4월 20일

내 남편 마크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 우리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언젠가 흑인이 대통령이 될 거라는 생각과 비슷해 보였다. 빌 클린턴이 문을 조금 열긴 했지만, 의회가 결혼보호법[주: 남성과 여성의 결합만 결혼으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키자 그 문은 쾅 닫혔다. 그러나 그 사이의 몇 개월은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24살이었고, 내게 커밍아웃할 용기를 준 사람은 클린턴이었다.

우리는 2003년까지는 결혼 투쟁에 개인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2003년에 마크는 LGBT 결혼 명부를 만들었고 우리는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결혼 금지를 시행한 주들이 늘어났다.

2004년 3월 10일

개빈 뉴섬[주: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 동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에도 불구하고 동성 커플에게 결혼 허가증을 발급했다.]이 우리에게 샌프란시스코 시청 사무실을 개방하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마크와 내겐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이게 인정될까?" 우리는 계속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부모님이 결혼하실 때는 "이게 인정될까?"는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마침내 합법이 되면 결혼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게 인정될까?

우리는 '예스'라고 말했다.

사무실은 몇 주 동안 예약이 꽉 차 있었지만 다음 날 빈 시간이 있었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부모님께 나중에 '진짜로' 다시 하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기억나는 건 아주 평범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멋질 수 있는지.

아름다운 낯선 사람 두 명이 우리의 증인과 사제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시청의 거대한 돔 아래서 결혼 서약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인정을 받았을 때, 나는 '동거 관계'와 결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2시간 후 법원은 결혼을 중단시킨 다음 우리의 결혼 허가증을 취소했다. 결국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정되었다.

2008년 1월 1일

4년 뒤 마크와 나는 게이 결혼 감시 Gay Marriage Watch 블로그를 시작했다. '결혼 평등'이라는 말은 그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버락 오바마라는 일리노이 출신의 젊은 후보를 보고 신이 나서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4년 전에는 우리 결혼 허가증을 빼앗아갔던 6월 16일에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나는 엄청나게 행복했다. 우리가 정당하다는 선언, 우리에 대한 지지, 희망이었다.

이 판결은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 주 헌법 8조의 증오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고, 곧 광고들이 나타났다. "당신 마음에 들든 안 들든"라고 내뱉은 뉴섬 시장은 우리들의 별 효과 없던 광고들을 완전히 짓밟다시피 했다[주: 뉴섬 시장은 "이제 문이 활짝 열렸다. 당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이 일은 일어날 것이다."며 동성 결혼 지지 발언을 했다]. 8조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지지율은 42%에서 48%까지 올라갔다. 우리 동네의 집 앞뜰들에는 조롱하는 노란 팻말들이 넘쳐났다.

나는 자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 8조에 반대하는 사설을 블로그에 쓰곤 했다. 그저 분노, 공포, 슬픔을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갑자기 예전으로 돌아갔다. 지금 결혼할까, 아니면 기회를 잃어버리는 위험을 감수할까? 선거 3주 전만 해도 우리는 뇨끼와 프렌치 프라이를 먹으며 우리가 원하는 결혼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부모님을 초대하고...... 진짜로 하면 어떨까?" 내가 물었다.

마크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오겠다고 하셨다.

내 어머니는 내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부터 내 편이었지만, 우리가 게이 이슈를 이야기할 때면 늘...... 잠시 침묵이 있었다. 이제 어머니는 그냥 "그래."라고 하셨다. 뜸을 들이지 않으셨다.

선거 전에 하려고 우리는 미친듯이 서두르며 사제, 바이올린 연주자, 사진사를 찾았지만 장소가 없었다. 그러다 베이 브리지가 보이는, 지붕이 있는 레스토랑 파티오를 찾아냈다.

결혼식 날은 다가오는데 강우 확률은 20%에서 100%로 올라갔고, 우리가 결혼 서약을 할 때 비가 가장 심하게 내릴 예정이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혼식날 비가 오면 재수가 좋대." 마크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정말 많은 기억이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사계'를 연주했다. 사제는 우리에게 숨을 쉬라고 말하고, 내가 '숨쉬어'라고 계속 말하자 비틀거리며 미소지었다. 내 아버지가 축사를 읽었고,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촛불을 건네주었다. 우리의 유대를 확정하는 말들이 오갔다.

이게 옳다는 따뜻한, 완벽한 느낌. 우리만 남게 되도록 도시를 차단해준 비.

다 끝났을 때 우리는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퀴어 아이였던 우리는 사람들이 TV, 영화, 현실에서 결혼하는 것을 보았지만, 우리 자신은 그런 완벽한 날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한순간에 변할 수 있다.

17년을 함께 지낸 우리에게 그 날은 완벽한 날이었다.

2008년 11월 4일

사흘 후에 변화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오바마가 이겼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1시간도 지나지 않아 8조가 통과되었다. 끝인 것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싸워왔던 모든 것을 고통스럽게 거절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시작이었다. 고통은 불과 7년만에 전국을 휩쓴 새로운 아이디어, 즉 결혼 평등의 촉매가 되었다.

2015년 6월 26일

우리가 결혼한지 7년 뒤, 우리는 네 번째로 대법원 판결 발표를 기다렸다. 지난 번 발표에서는 8조가 쓰러졌다. 이제 미국 대법원은 결혼보호법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 우리가 진다면 우리는 한 세대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긴다면 내 세대를 규정한 분투는 끝이 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스'라고 말했다. 어마어마한 기쁨의 순간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대법원은 헌법은 결혼 평등을 보장한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라 대법원은 모든 미국인들은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와 무관하게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불확실하지 않은 단어를 써서 우리가 우리의 결합을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끝이었다.

2016년 4월 30일

4월 말에 나는 결혼 평등 감시 블로그에 마지막 포스트를 올렸다. 내가 처음으로 올렸던 포스트들 중 하나를 다시 올린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미국에서 게이 결혼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정말 대단하지 않을까."

정말 대단했다.

2016년 6월 26일

나는 몇 년 전부터 글을 써왔고, 결혼 평등의 날에 나온 '더 완벽한 결합'에 참여했다. 게이임을 공개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혼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 4개를 묶은 것이다.

나, B.G. 토마스, 제이미 페센덴, 마이클 머피(위 사진)는 결혼 평등이 결코 실현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다.

우리 넷의 결혼 기간을 다 합치면 21년, 커플로 지낸 기간을 다 합치면 88년이다. 우리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적었다.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 엮은 판타지와 로맨스의 이야기이다.

이번 1주년을 기념하며, '더 완벽한 결합'은 게이이든 스트레이트이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결혼의 보편적 진실을 기린다.

나는 이 책이, 그리고 여기까지 온 마크와 나의 여정이 정말 자랑스럽다. 이 이야기들을 보고 마음이 바뀌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미래

다음은 뭘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펄스 나이트클럽에서의 끔찍한 총기 난사는 아직 이 나라에서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들만의 8조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트랜스 형제 자매들에겐 우리의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양성애자 삭제를 끝내야 하며, 모두가 평등한 대접을 받도록 해야 한다.

결혼 평등은 끝은 아니지만 승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퀴어 애즈 포크' 대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상실은 많으니 애도하라. 그러나 승리를 축하하라. 승리는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리했다. 하지만 올랜도 총기 사건, 휴스턴, 인디애나, 미시시피,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새로운 LGBTIQA 시도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싸우는 과정에서 잃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허핑턴포스트US의 Marriage Equality -- One Year Later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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