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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두환-이명박으로 이어진 권력의 '특혜'를 빼놓고 롯데의 성장을 설명할 수는 없다

  • 허완
  • 입력 2016.06.25 11:55
  • 수정 2016.06.25 12:04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지난해 5월22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타워(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방문해 진행 상황을 설명 듣고 있다. ⓒ롯데그룹

[토요판]뉴스분석 왜? / 롯데의 권력 밀착사

▶ 롯데그룹은 모태인 일본의 롯데제과(1948년 설립)로부터 따지면 68년의 역사를 가졌다. 1967년 한국 진출을 기준으로 하면 49년이 된 기업이다. 한국 롯데는 재계 서열 5위에 오르는 등 그동안 눈부신 성장을 했다. 지난해 81조원의 매출액을 기록해 3조원에 그친 일본 롯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롯데는 후계 다툼에다가 기업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위기를 겪고 있다. 롯데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뿌리를 뒤져봤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도쿄를 출발해 김포공항으로 가는 대한항공에는 ㈜롯데제과의 사장 신격호가 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주일대사 이후락이 앉았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청와대로 직행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격호가 한국에 오기 전날인 12일 서울시는 대대적인 부정식품 단속 결과를 발표했다. 껌에서 쇳가루가 나왔던 롯데제과는 석달간 제조정지 처분을 받았다. 롯데제과는 한-일 수교 2년 뒤인 1967년 신격호가 일본에서의 성공을 본떠 한국에 세운 껌 만드는 회사였다. 단기간에 한국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롯데로서는 이 조처로 이미지나 매출에서 치명타를 입을 게 확실했다. 신격호는 박정희를 만나자, “일본 시장을 제압하고 동남아 등지에도 수출하고 있는데 모국에서 이런 대접을 할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알아보고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신격호를 달랜 박정희는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서울 중심지인 소공동의 반도호텔을 불하해줄 테니 국제적인 호텔을 새로 지어서 경영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함경남도 흥남 질소비료공장의 소유주였던 일본인 노구치 시타가우가 1938년 만든 반도호텔은,해방 이후 국가가 인수해 당시 관광공사가 운영 중이었다. 미 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 이승만 정권의 실력자 이기붕, 2공화국 때의 총리 장면 등이 애용하던 유서 깊은 호텔이었다.

일본에서 껌과 초콜릿 등 과자를 만들어 팔던 신격호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뒷날(1988년 6월5일치 <아사히신문>) “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해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씨가 쿡쿡 찌르면서 ‘여하간에 이 자리에서는 예라고 대답하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도리없이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일 수교 이후 제철업에 진출하려고 준비했다가 우리 정부가 직접 나서는 바람에 포기했던 점을 고려하면 호텔사업이라고 뛰어들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경제발전으로 관광수요가 늘어날 것이 예상되는데다 정권 차원에서 전적으로 밀어주겠다는데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롯데 주차장 지으려 산은 부지 매각 종용

롯데호텔 신관과 백화점이 있는 왼쪽 부지가 옛 상업은행 본점이 있던 자리. ⓒReuters

이날 청와대 면담은 과자회사 롯데가 호텔과 유통업을 거느린 재벌로 탈바꿈하는 출발점이었다. 정권이 제공한 각종 특혜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74년 6월 반도호텔 매각입찰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롯데만 단독응찰해 41억9800만원에 샀으며, 반도호텔 옆에 있던 국립도서관도 박정희의 매각 지시로 손쉽게 차지했다. 중국 음식점 아서원을 비롯한 사유지 매입에는 동장이 나서 주민들을 설득하는 등 도움을 줬다. 앞서 1973년 10월 어느 날 국무총리 김종필은 서울시장 양택식과 도시계획국장 손정목을 집무실로 불러 호텔롯데 건설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했고, 손정목은 이후 동장을 동원했다.

신격호는 호텔 건설에 그치지 않고 유통업(백화점)으로도 손을 뻗었다. 롯데는 애초 소공동 호텔 옆에 9층짜리 부속건물을 짓겠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막상 건물이 올라가면서 25층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용도도 처음에는 투숙객을 위한 쇼핑센터(1, 2층)였지만, 완공을 앞두고는 ‘백화점(1~7층)과 임대사무실’로 변했다. 당시는 도심 인구집중 억제정책이 강력히 실시되던 때여서 당연히 대규모 백화점은 허가될 수 없었다. 하지만 허락하고 싶어하는 박정희의 의중을 읽은 서울시 한 공무원이 명칭을 ‘쇼핑센터’로 바꾸는 꾀를 냈다.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숨지기 몇 시간 전인 1979년 10월26일 오후 ‘롯데쇼핑센터’를 재가했다. 박정희는 앞서 그해 4월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자리에 있던 산업은행 본관 땅을 주차장이 부족한 롯데에 팔도록 하는 ‘이상한’ 방침도 재가했다.

신격호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5·16 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과도 가까이 지냈다. 한-일 수교 협상 때 막후에서 협상 대표였던 김종필 등을 도왔으며, 김종필의 오른팔 격이었던 김동환을 1973년부터 74년까지 호텔롯데 사장으로 데리고 있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때가 롯데그룹의 형성기였다면, 전두환 정권 시절은 재벌로의 도약기였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와 이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도 롯데 밀어주기에 적극적이었다. 첫 작품은 산업은행의 버티기로 미적거리고 있던 소공동 산은 부지를 롯데한테 빨리 넘겨주도록 한 것이었다. 롯데는 이 땅에 주차장이 아니라 호텔 신관을 만들어, 호텔 객실과 백화점 면적을 대폭 늘렸다. 시내 중심가에 롯데타운을 완성했다.

잠실 땅 특혜매입 직전 전두환에 50억 줘

2011년 경기도 오산 롯데인재개발원에 문을 연 ‘롯데역사관’의 내부 모습. 롯데그룹의 모태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1948년 일본에서 설립한 롯데제과이다. 신 총괄회장은 1965년 한-일 수교 2년 뒤인 1967년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 롯데는 처음에 껌 회사로 출발했으나, 1970년대부터 호텔과 백화점으로 진출해 현재 재계 순위 5위이다. 한국 롯데의 지난해 매출은 81조원이었으며, 일본 롯데는 3조원이었다. 연합뉴스

손정목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처음에 신군부는 신격호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 것은 전·신 두 사람의 단독면담이 이뤄진 직후부터였다고 한다”며 “확실한 것은, 전두환은 국보위 의장 때부터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롯데그룹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밝혔다. 또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기업인 하나를 꼽으라면 신격호가 거명될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장한 잠실 롯데월드는 전두환의 전적인 지원에 힘입어 건설됐다. 원래 이 땅은 율산이 1979년 부도난 뒤 토건재벌인 ㈜한양의 소유로 바뀐 곳이다. 올림픽 유치가 1981년 확정된 뒤 잠실지구에 대규모 관광위락시설을 유치하려던 전두환 정권의 처지에서는 부도 직전에 있던 한양을 대신할 자본이 필요했다. 롯데가 선택됐다. 롯데는 1987년 5월 공공자산인 석촌호수(서호)의 개발권마저 손에 넣었다. 롯데는 석촌호수(서호)를 사실상 독점 사용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막판에 제2롯데월드의 땅 2만6천평을 차지하는 과정도 온통 특혜투성이다. 롯데월드 길 건너편의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일대의 이 땅은 위치나 규모에서 서울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였다. 서울시가 갖고 있던 체비지였던 이 땅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87년 12월12일 전격적으로 롯데에 불하됐다. 매각 계획이나 준비가 전혀 없었지만, 청와대에서 내려온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한달 전인 그해 11월 신격호는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을 독대했다. 훗날 전두환 비자금 수사에서 이때 50억원을 직접 건넨 것으로 밝혀졌다. 입찰에는 ‘이상하게도’ 롯데만 참가했고, 매입 가격은 시가의 절반 수준인 819억원에 불과했다.

잠실 땅을 손에 넣은 신격호는 100층이 넘는 빌딩을 세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새 정권 출범 후 그는 대통령 노태우를 만나 “100층 건물을 짓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시작으로 각 정권 때마다 권력에 직간접적인 줄을 댔다. 김영삼 정권 때는 막후 실력자인 차남 김현철씨의 장인 김웅세를 롯데물산 사장으로 끌어들였다. 제2롯데월드 사업을 추진하던 자리였다. 김영삼과 오랜 친분이 있는 신격호는 1990년 3당 합당 때 청와대 쪽 요청으로 막후에서 김영삼을 설득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제1부속실 행정관(여택수)에게 정권 실세인 안희정한테 주라며 3억원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잠실 지역의 교통 혼잡 문제와 인근 군사기지인 성남 비행장(서울공항)의 항공안전 문제로 인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모두 퇴짜를 맞았다.

오래 기다린 덕분인지 신격호는 전두환 이후 20년 만인 2008년 궁합이 딱 맞는 정권을 다시 만났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전면에 내세운 이명박 정권이 등장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시절인 2006년 2월에도 제2롯데월드 건설계획안을 최종 승인했다. 하지만 공군의 반대를 수렴한 노무현 정부가 이 문제를 행정조정협의에 넘김으로써 제동이 걸렸었다.

이명박에 스위트룸 장기 거주 편의 제공도

2008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은 롯데 밀어주기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그해 4월28일 청와대에서 연 ‘투자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합동회의’에서 제2롯데월드 계획에 우려를 표시한 국방장관 이상희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어 “날짜를 정해놓고 그때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검토하라”고까지 압박했다. 이후 엠비는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을 경질하는 등 공군의 반대론자들을 억누른 뒤 마침내 2009년 최종 승인했다. 이때 용적률과 건폐율도 상향 조정돼 층수가 112층에서 123층으로 늘어났다.

롯데그룹과 이명박 정권의 밀착도는 역대 최고였다. 롯데는 이명박의 고려대 경영학과 친구인 장경작을 2005년 영입한 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제2롯데월드 사업을 총지휘하는 호텔롯데 총괄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사업 승인 뒤 물러났으며, 지금은 이명박이 세운 청계재단 감사로 있다. 또 이명박은 2007년 당내 대선 경선 즈음부터 롯데호텔 31층 스위트룸에 머물렀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24일 “이명박 부부가 롯데호텔 스위트룸에서 먹고 자고 했다”며 “주요한 보고나 협의를 위해서는 측근들이 호텔로 찾아가야 했다”고 말했다. 당선자 시절에도 이명박은 이곳에서 조각작업 등을 했다. 장경작이 스위트룸 편의를 봐준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는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46개였던 계열사가 79개로 늘어났다. 자산 총액도 49조2천억원에서 95조8천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최대의 수혜자는 롯데였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롯데는 소진세(대외협력단장)와 노병용(롯데물산 사장)을 중용했다. 소진세는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소, 노 둘의 정치적 배경은 박 정권의 최대 실세인 최경환과 동문(대구고)이라는 점이다. 이들 세명은 대구고 출신 친목모임(대구 아너스 클럽) 회원이다. 권력에 줄을 댄 때문일까? 롯데는 2013년 대대적인 세무조사에도 불구하고 추징금 600억원으로 ‘선방’했다. 당시 세무조사에 이은 검찰 수사로 오너 이재현이 구속됐던 씨제이(CJ)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롯데의 경우, 1996년 이뤄진 전두환 비자금 수사 때 1984년 10억원을 비롯해 5차례에 걸쳐 150억원의 뇌물을 신격호가 청와대에서 전두환한테 직접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그동안 오너가 처벌되지는 않았다.

신격호의 40년에 걸친 꿈인 마천루 완공을 눈앞에 둔 롯데그룹은 지금 최대의 시련기를 맞았다. 후계자를 둘러싼 골육상쟁에다가 자칫 오너가 구속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창사 70년을 앞둔 롯데는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까.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 5권(손정목 지음), <거인의 황혼>(정순태 지음), <신격호는 어떻게 거인 롯데가 되었나>(김태훈 지음) 등을 기사 작성에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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