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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만 있고 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2014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계약직 여성 권 씨(향년 25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 씨가 남긴 유서와 이메일에는 정규직 전환의 희망 아래 24개월간 성희롱과 부당한 대우를 참아온 사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며 2014년 11월 중기회는 관련 간부들을 해임하고 면직했다. 그러나 그들이 겨우 4개월 만인 2015년 3월에 복직됐고 성폭력 용의자들 또한 모두 증거불충분 무혐의 판정을 받았음이 최근 보도를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다시 말해 없던 일이 돼버린 것이다.

  • 홍형진
  • 입력 2016.06.23 12:02
  • 수정 2017.06.24 14:12
ⓒShutterstock / dragon_fang

2014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이하 중기회)에서 일하던 계약직 여성 권 씨(향년 25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 씨가 남긴 유서와 이메일에는 정규직 전환의 희망 아래 24개월간 성희롱과 부당한 대우를 참아온 사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며 2014년 11월 중기회는 관련 간부들을 해임하고 면직했다.

그러나 그들이 겨우 4개월 만인 2015년 3월에 복직됐고 성폭력 용의자들 또한 모두 증거불충분 무혐의 판정을 받았음이 최근 <비즈한국>의 보도를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다시 말해 없던 일이 돼버린 것이다. 그 추이를 기존의 언론 보도, 권 씨가 남긴 이메일, 별도의 정보 등을 기반으로 요약해서 전한다.

1) 권 씨의 업무와 처우

권 씨는 중기회 인력지원본부 CEO리더십센터 소속으로 'SB-CEO 스쿨'을 보조하는 업무를 맡았다. SB-CEO 스쿨은 중소기업 CEO와 국회•정부 등의 중소기업 관련 인사를 대상으로 하는 최고경영자과정이다. 자연히 40~50대 중년의 남성 유력자들이 권 씨의 고객이자 '갑'이었다.

권 씨의 직함은 '전문위원'이었지만 실제 처우는 아르바이트나 다름없었다. 세전 150만 원, 세후 136만 원이 권 씨의 월급이었다. 야간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 출장비, 중식대 등이 없었기에 136만 원으로 생계와 업무를 모두 감당해야 했다.

2) 쪼개기 계약과 희망고문

권 씨는 2012년 9월 1일에 근무를 시작했고 2014년 8월 25일에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정확히 2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다. 2개월, 4개월 등의 단위로 7차례에 걸쳐 계약을 갱신해왔음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고, 중기회 내부 문서에 "누적 근로계약기간이 2년 이상인 경우 무기계약 대상이 되므로 각별히 유의하라"는 문구가 있음도 드러났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중기회는 권 씨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권 씨는 상사들로부터 전환과 관련한 귀띔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인사권이 있는 전무는 전환을 구두 약속하기도 했다. 권 씨는 녹취한 통화에서 상사에게 "설마 했어, 아무런 대책 없이 저한테 (무기계약직 전환을) 장담하신 줄이야. 이거 사기예요"라고 말했고 유서에는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어. 내가 순진한 걸까? 터무니없는 약속을 굳게 믿고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었던 게..."라고 썼다.

전환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중기회 관계자는 권 씨와 같은 처지의 직원이 60~70명이나 되므로 형평성을 고려한 처사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기회에는 전환한 선례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대우하며 쪼개기 계약을 반복하다가 2년이 차면 정리하는 것이 일관된 방침이었다. 전환 가능성이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상사들은 공수표를 발행했고 권 씨는 그걸 믿었다.

3) 중년 남성 원우들의 끊임없는 성희롱

권 씨가 2014년 6월 회사 상사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SB-CEO 스쿨 원우들의 모멸적인 성희롱을 오래도록 감내해왔음이 담겨 있다. 50대의 중소기업 대표는 권 씨에게 스폰서 관계를 제의했다. 해외에서 억지로 선물을 사다 주려고 하며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중기회 최고위층 측근과 식사를 한다며 전환과 관련한 협박 뉘앙스의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스토킹에 지친 권 씨는 결국 새로운 전화번호를 마련해야 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 대표는 워크숍에서 노래를 같이 하자며 권 씨를 억지로 무대로 이끌었고, 이후 2차 장소에서 여러 불쾌한 신체접촉을 반복하며 질척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권 씨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학교(강좌)에 못 갈 것 같아. ㅃㄱㄹ 해야겠네. 미안미안. 근데 ○○씨 ㅃㄱㄹ가 뭔지 알아?" 등의 언어폭력도 자행했다.

이메일에는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성폭력이 담겨 있으나 굳이 일일이 옮기지는 않는다. 다만 권 씨가 남긴 아래의 두 문구만을 그대로 전한다. 그런 모멸적인 상황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그의 심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40~50대 아저씨들과 그런 식으로 어울리고 싶겠습니까. 다 제 고객이기 때문에 정말 이 악물고 받아주고, 그 상황을 너무 힘들게 생각해버리면 진짜 힘들어지기 때문에 애써 좋게 받아들이는 척하는 겁니다."

"거의 스토킹 식으로 끊임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그 사람을 정말 없애고 싶을 정도로 분노해도, 원우들 앞에서는 웃고 있는 저를 보면서 쉽게 말해 약간 맛이 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4) 성희롱 진정을 대하는 중기회의 자세

권 씨는 '굵직한 이야기만' A4 7장 분량의 이메일에 담아 부장에게 보냈다. 그러나 부장은 자신이 전무를 직접 만나 전환을 거의 성사시켜놓은 마당에 그런 이메일을 받아서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기회 또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덮기에만 급급하다가 권 씨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권 씨는 유서에 "내가 그 메일을 안 보냈다면 이렇게 됐을까? 충분히 보복 의도를 갖고 고의적으로 이 결과를 만들었다고 본다"라고 썼다. 이후 유족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기업 대표들의 성추행 문제를 제기하니까 약속했던 정규직 전환 약속을 하루아침에 깨버리면서 아이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바 있다.

5) 전원 증거불충분 혐의 없음

2014년 10월 유족은 중기회, 상사 2명, SB-CEO 스쿨의 원우 4명을 고발했다. 하지만 2015년 2월 검찰은 전원 증거불충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성추행 사건에서 절대적으로 중요시되는 피해 당사자의 증언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 씨가 남긴 유서, 이메일, 메시지, 통화 녹취 등만으로는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이는 성폭행, 성추행을 법정에서 다루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문제시되는 대목이다. 사망 또는 심리적 이유 등으로 피해 당사자가 부재할 경우 많은 증거가 일방적 진술로 전락하는 경우가 잦다.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잡아떼는 전략으로 일관하면 수사는 어느 선에서 중단되기 일쑤다. 이번 사건처럼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가해자를 처벌하는 단계까지 간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징계받은 이들의 복직

2014년 11월 중기회는 무기계약직 전환 암시 발언, 성희롱, 회사 명예 실추를 이유로 일부 직원에게 해임, 면직, 감봉 등의 처분을 내리며 사과문 형식의 성명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징계받은 이들은 4개월 만인 2015년 3월에 중기회에 복직했고 이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복직은 판결과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해임된 전무는 법원에서 승소해 복직한 후 중기회를 떠났고, 면직된 부장은 징계 한 달여 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이하 서울노동위)에 부당해고 구제를 신청해 '징계양정이 과하다'는 복직 권고 판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담당 조사관의 판정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성적 수치심 유발 발언을 한 건 징계사유로 인정되나 무기계약직 전환에 노력했기에 전환 희망을 준 게 부당하다 보기 어렵다. 인력관리 문제이며 회사 책임도 없지 않다. 유서의 성희롱 발언도 당시 성희롱으로 인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사후에 사과하고 양해가 이뤄진 것으로 보여서, 이 사건 근로자에게 징계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가장 가혹한 면직의 책임을 묻는 건 비위 행위에 비해 양형이 과하다."

중기회는 서울노동위의 판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지만 재심 가능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복직한 부장은 여의도 본사에서 멀지 않은 수원 영통구의 지역본부로 무보직 발령됐다. 중기회 관계자는 이를 징계나 다름없는 인사 조치라고 설명하며 "수원이면 감싸기이고 강원도나 제주도면 징계냐?"라고 반문했다.

아울러 "서울노동위 판정에 따라 복직 처리했으며 권 씨의 사망과 ○ 부장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했다. 잘못은 중소기업 CEO들이 했는데 (중기회의) 상급자가 부당한 책임을 진 부분이 다소 있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7) 법망을 벗어난 성폭력 용의자들

이메일에 거론된 성폭력 용의자들은 법망을 벗어났다. 검찰이 증거불충분 무혐의로 처분한 이상 그들은 거리낄 것이 없다. 중기회 직원들과 달리 SB-CEO 스쿨의 원우는 대부분 기업대표 등의 유력자이기에 자신의 고용을 걱정할 입장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기업의 대표인지만 공개되지 않으면 일상에 아무런 타격이 없다.

이 대목에서 나의 사견을 조금 덧붙이겠다. 사실 많은 언론이 그들의 신상정보를 확보한 지 오래지만 무혐의 판정이 난 상황에서 그걸 공개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에게도 자연인으로서의 권리가 있는 데다 만에 하나 공개했을 때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는 막연한 혐의나 추문만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기 일쑤인데 정재계의 유력 인사는 이런 건이 불거져도 청정구역에서 살아가니까.

8) 더 읽을거리

서두에서 밝혔듯 사건의 추이를 정리하기 위해 여러 언론의 보도를 참고했다. 그중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하는 기사를 세 편 링크한다. 권 씨의 내밀한 목소리와 심정에 귀 기울이고픈 사람에게는 <시사인> 기사를, 사건의 체계적인 정리와 권씨 주변인의 진술을 읽고픈 사람에게는 <미디어오늘> 기사를, 중기회 직원의 복직과 관련한 최근의 상황을 알고픈 사람에게는 <비즈한국> 기사를 권한다.

- 정규직 꿈꾸었던 그녀의 죽음(시사인)

- 비정규여성 자살 중소기업중앙회 내에도 성희롱•은폐 있었다(미디어오늘)

- 중기중앙회 자살사건 '그들'이 돌아왔다(비즈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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