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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

  • 박수진
  • 입력 2016.06.22 10:40
  • 수정 2016.06.22 10:42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평화로운 공존을 찬미하는 퀴어문화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지난 11일, 서울광장은 무지개색으로 물들었다. 비록 소나기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였지만 시비를 걸어오는 성소수자 혐오세력과의 충돌 또한 예년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고, 주최 쪽 추산 4만5천명이 참여해 역대 최장거리를 행진한 올해의 퍼레이드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지시각 지난 12일 새벽,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위치한 게이 나이트클럽 ‘펄스’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범인 포함 사망 50명, 부상자 53명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신의 이름으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극단주의, 미국의 느슨하기 짝이 없는 총기규제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 앞에서 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한국의 시민들 또한 전세계적인 애도의 흐름에 함께했고, 수많은 연예인들 또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추모에 동참했다. 그런데 유독 지드래곤과 조권은 발언을 했다가 악성 댓글들에 시달려야 했다.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이들의 추모 게시물에만 악성 댓글이 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드래곤은 무지개색 하트가 흔들리는 동영상을, 조권은 무지개색 깃발 사진을 올리며 추모에 동참했다. 단순히 추모의 뜻만 밝힌 게 아니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상징색인 무지개색을 사용해서 희생자들을 어떤 맥락에서 추모하는지 명확하게 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게시물을 지우고 무지개색이 없는 이미지를 새로 올려야 했다. 원더걸스의 유빈 또한 무지개색 하트 그림을 올렸다가 비슷한 이유로 그림을 지워야 했다. 비극을 추모하는 것까지는 용인하겠지만, 이것이 성소수자 혐오의 맥락 위에 있는 범죄라 말하는 건 허락할 수 없다는 일부 팬들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미 게시물이 지워진 탓에 확인하긴 어렵지만, YTN의 보도에 따르면 무수히 많이 달렸던 악성 댓글 중 많은 수가 동남아시아 출신 이슬람교도들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기에 난사범이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집단 이슬람국가(IS)에 충성서약을 했다는 보도가 더해지며 일각에선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동남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케이팝 시장이 크다 해도 혐오발언을 일삼으며 추모까지 막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 “이것이 이슬람 종특(종족 특성의 줄임말.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부정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멸칭)”이라는 식의 말들도 인터넷 공간을 떠돈다. 그러나 이게 과연 이슬람의 문제일까? 그럴 리가.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낙인찍는 일에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인 것을. 6월11일 서울광장 주변을 둘러싼 채 혐오집회를 연 이들이 그들 아니던가. 그러면 종교 자체가 문제인 걸까? 글쎄, 진짜 문제는 혐오자가 믿는 종교가 아니라, 그가 신의 이름을 참칭해 정당화하려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 그 자체라는 것을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6월 11일 퀴어축제 현장 옆에서 열린 종교단체의 집회

굳이 종교를 내세우지 않아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다양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등장한다. “에이즈를 퍼트리고 다니는 집단”이라는 식의 ‘의학적’ 견해, “성욕은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드는 욕구인데 동성애는 번식이 불가능하니 이상성애”라는 식의 ‘생물학적’ 견해, “남자인 나를 겁탈할지 모른다”는 공포 기반 혐오, 그리고 “그냥 싫다”는 핑계 없는 혐오까지.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진 직후 사건을 전하는 기사 밑에는 “어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었어야 하는 일이 오늘 미국에서 일어났군”이라는 리플이 달렸다. 이 밑도 끝도 없는 혐오. 일부 극우세력이나 철모르는 아이들만 그러는 게 아니냐고? 지난주 토요일, 1면에 한국 최초의 동성혼 소송을 제기한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사진 위에 무지개빛 필터를 씌워 대문 이미지로 내걸었던 신문이 있었다. 평소 진보적인 논조를 앞세웠던 것으로 유명한 해당 신문사에는 독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지난주 한겨레 토요판 이야기다. 설마 그 많은 독자들이 죄다 한겨레 독자를 가장한 ‘철모르는’, ‘극우세력’이나 근본주의 광신자였을라고?

꼭 성소수자 이슈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선 왜곡된 지형 속에 억압당하고 있는 약자들과 연대하는 듯한 시늉만 해도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게 연예인이면 더더욱. 조권은 트랜스젠더 가족극 뮤지컬 <프리실라>에 출연해 프레스콜에서 ‘머터리얼 걸’ 무대를 선보였다가 악성 댓글에 시달린 끝에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일갈하기에 이르렀고, 에프엑스의 엠버는 짧은 머리와 바지 차림을 즐긴다는 이유만으로 “남장여자”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지쳐 “모두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내용의 노래 ‘뷰티풀’과 “사람들이 날 깎아내리려 해도 쓰러지지 않고 경계를 넘겠다”는 내용의 노래 ‘보더스’를 발표했다. 그래도 한국에선 우르르 몰려가서 쓴 글을 내리라고 괴롭히는 일은 없지 않았느냐고? 지난달 5월26일 경희대학교 총여학생회 주최로 열릴 예정이었던 토크콘서트 ‘마이리틀여혐’은 하루 전날 급하게 취소됐다. 토크콘서트에 방송인 서유리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인터넷상에서 서유리에 대한 상식 밖의 인신공격을 가하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갔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정 종교나 특정 정치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 그 자체의 문제라는 증거다.

혐오는 이리도 무럭무럭 자라는데 혐오에 반대하는 이들의 입에는 재갈이 물리는 상황의 반복. 여기엔 제 임무를 방기한 미디어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KBS는 뉴스에서 퀴어퍼레이드를 보도하며 혐오세력들과의 인터뷰를 비중 있게 전했고, 이어진 꼭지에서도 한국 사회 내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SBS는 한 술 더 떴다. “또 충돌 부른 성소수자 퍼레이드”라는 리포트는 그 제목을 통해 마치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혐오세력과의 충돌을 불러온 책임이 퍼레이드를 주최한 퀴어문화축제 쪽에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줬고, 내용 또한 혐오세력과의 충돌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일관했다. MBC는 아예 퀴어퍼레이드를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이라는 비극 앞에서도 언론은 혐오를 조장했다. 연합뉴스는 사건이 벌어진 클럽이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 게이 나이트클럽이어서 교민 피해가 있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전했다. 현지에 있는 우리 교민들 중엔 성소수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씁쓸하게도, 4만5천여명의 인파가 서울광장에 모여 “당신들이 외면한다고 해도 성소수자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시끌벅적한 파티를 벌인 바로 다음날 언론을 통해 나온 발언이었다.

지드래곤과 조권, 유빈이 기껏 올린 게시물을 지우기까지, 이런 복잡한 배경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엉켜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갖가지 핑계로 합리화를 시도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나와 입장이 다른 이를 쪽수로 주저앉힐 수 있다는 일종의 패거리주의, 기계적 중립이나 편견의 조장을 통해 저항의 부재를 방조하는 미디어가 결합해 추모의 뜻을 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세지옥을 만든 셈이다.

혐오에 반대하는 이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더 많은 펄스와 더 많은 퍼레이드와 더 많은 무지개색 하트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침묵으로 이 강요된 진공상태를 받아들인다면, 이다음에는 그저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을 지우길 요구받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명복과 부상자들의 빠른 회복을 빌며,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혐오에 맞서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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