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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과 노동자의 눈물 | 진보진영 '남 탓의 정치학'

정당-노동조합-지식인 사회 전체가 '고용안전망-산업구조 고도화-구조조정의 패키지'에 대한 대안적 담론, 대안적 정책, 대안적 정치행위를 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겪게 되는 것들이 정리해고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자살,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고통이 예고된 하청-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그리고 서러움들이다. 이에 대해 그간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과 진보정당에 속했던 분들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이거나,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책임이라고 돌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남 탓의 정치학'이다.

  • 최병천
  • 입력 2016.06.17 07:36
  • 수정 2017.06.18 14:12
ⓒ연합뉴스

심층취재를 주로 하는 주간경향 박송이 기자의 기사 <'솟아날 구멍'마저 없는 실업안전망>은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정규직으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그리고 하청-비정규직들의 해고 이후 상황을 취재했다.

우리나라에서 고용보험 제도는 1995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도입된 고용보험제도는 <낮은 소득대체율과 짧은 수급기간>의 특징을 갖는다. 그 증거물로 남아있는 것이 현행 고용보험제도의 <낮은 급여율과 짧은 수급기간>이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 130만원 내외의 저소득 노동자들은 직전 급여의 약 80%를 받지만, 500만원 내외의 고소득 노동자들은 직전 급여의 약 20%~30% 수준밖에 받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고소득을 받던 이들의 입장에서 (고용안정시기와 비교하면)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들은 다 그런 '살인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최근 조선업의 구조조정 이슈가 한국사회에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것이 일시적인 '경기변동 이슈'가 아니라, 한국 재벌체제의 산업-기술적 근간이었던 <중후장대 제조업의 위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파고 충격 이후' 한국사회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어떤 두려움과 합의가 이뤄진 상태이다.

요컨대, '구조조정'은 앞으로 과거에 비하면 훨씬 일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동시에 <현행, 임시방편적인 고용보험제도>는 더더욱 그 취약함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조선업,해운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우리가 앞으로 접하게 될 '노동자들의 눈물'에 관한 기사는 이러한 <제도적 공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다.

구조조정은 사실 '산업구조 고도화'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1인당 GDP가 5만달러가 넘는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내수의 협소함을 돌파하기 위해 '수출' 비중을 늘리며 경제성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즉, 경제성장을 하기 위해 <외적 환경변화>로 인한 '산업구조 고도화'를 주어진 제약조건으로 수용했고, 내수의 협소함 돌파 ⇒ 수출 중심 산업화 ⇒ 강력하고 빈번한 외부충격 ⇒ 산업구조 고도화 ⇒ 구조조정 필요성 적극 수용 (주어진 제약조건으로 적극 수용) ⇒ 사회안전망 강화 ⇒ 산업구조 고도화 ⇒ 외부충격(구조조정 충격)에 대한 사회경제적 흡수의 경로를 밟아왔다.

그러나, '노동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는 한국의 제1야당은 이러한 고민을 할 여력도, 관심도, 실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조직노동'의 단순 대변자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양대노총으로 상징되는 조직노동은 대기업-공공부문-정규직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소득 상위 10%였기 때문에, '지금 현재 이대로'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급진적 구호'를 남발하되, 그 귀결은 '현행 체제'가 최대한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학계의 지식인 그룹 역시도 민주당-진보정당-조직노동 어딘가에 '걸쳐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러한 문화적-이념적 자장(磁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정당-노동조합-지식인 사회 전체가 <고용안전망-산업구조 고도화-구조조정의 패키지>에 대한 대안적 담론, 대안적 정책, 대안적 정치행위를 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겪게 되는 것들이 정리해고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자살,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고통이 예고된 하청-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그리고 서러움들이다.

이에 대해 그간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과 진보정당에 속했던 분들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이거나,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책임이라고 돌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남 탓의 정치학>이다. 민주당이 허구한 날 새누리당과 이명박-박근혜를 비난하며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면피하려는 것처럼,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있는 분들 역시도 허구한 날 이명박-박근혜 정부, 그리고 보수야당과 자본을 저주하며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면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면, 그분들의 '마음'은 평화로워질지 모르나, 그것은 문제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남 탓의 정치학>을 통해서 '우리'(?)의 책임을 면피-회피할수록, 노동자들의 눈물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서럽게, 흘러내리게 될 것이다.

<산업구조 고도화>의 필요성은 박근혜 정부가 의도하거나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재벌이 의도하거나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국민국가 단위의 경쟁력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 제약조건'에 다름 아니다.

헤겔은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라고 했다. 스웨덴은 20세기 초반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 사민당과 스웨덴 노총(LO)이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협소한 내수 돌파의 필요성=수출중심 산업화 전략=외부충격의 불가피성=산업구조 고도화=일상적 구조조정의 수용=사회안전망=복지국가>를 회피하거나 저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대안을 모색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1889년 창당되었던 스웨덴 사민당이 창당 이후부터, 칼레비, 비그포르스, 묄러, 뮈르달, 렌-마이드너 등으로 이어지는 <경제학-정치경제학-사회학-정치학-득표율 극대화-노동자와 국민적 이해관계의 접점 모색>을 동시에 추구하던 '지적(知的)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스웨덴 사민주의는 <지성(知性)의 힘으로 만든, 복지국가>였으며, 이론과 현실의 융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회과학의 힘으로 만든, 복지국가>이기도 했다.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 비정규직이 행복한 세상, 구조조정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세상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헤겔의 지적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 제약조건, 즉 '필연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전히,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해방은 '필연'을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되, 동시에 '필연'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자유는 언제나 '주어진 역사적 제약조건하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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