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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허약한 정신의 허무주의다

고시공부를 하며 외롭게 법전을 뒤적이고 시험문제를 풀어보던 20대부터 언젠가 40대가 되면 검사장이 되고 그러면 비상장회사의 주식을 거저 얻을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혹은 특수통이 되어 수사를 하면서 각종 재산 은닉과 탈세 기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권력을 가진 고위 공직자로 살았으면 비상장 회사를 이용하든 전관예우를 활용하든 수십억 또는 수백억의 보상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은 또 어디서 온 것일까? 검사나 변호사로 산다는 것은 범죄와 싸우는 것이기보다 범죄와 멋들어진 미뉴에트를 한판 추는 것이라는 '깨달음'에는 대체 언제 도달한 것인가?

  • 김종엽
  • 입력 2016.06.16 05:50
  • 수정 2017.06.17 14:12
ⓒ한겨레

남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는 없다. 타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사건을 똑같이 경험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있다. 모두들 그렇게 타인의 생각에 대해 추정한다. 이 추정이 잘 맞는 사람을 우리는 공감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추정은 종종 틀린다. 하지만 그럴 때도 추정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향한 자기 행동을 조정할 준거점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하고,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홍만표 변호사도 그렇게 하고, 출국금지 된 진경준 검사장도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추정컨대 홍 변호사와 진 검사장은 서로의 삶을 응시하며 어떤 후회를 할 것 같다. 홍 변호사는 전관예우의 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한몫 챙길 심산으로 정운호 같은 인간까지 변호하며 지냈던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되새기며 이렇게 생각할 듯하다. 그렇게 헉헉댈 필요 없었는데, 현직에 있을 때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권력 감정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후배 진경준처럼 가만히 100억쯤 챙기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진 검사장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현직에서는 좀 적게 챙겼어야 했어, 돈은 선배 홍 변호사처럼 퇴직 후에도 넉넉히 챙길 수 있고 우선은 말썽 없이 더 승진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혹은 홍 변호사와 진 검사장의 후배 검사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홍 선배와 진 선배가 너무 해먹는 바람에 그리고 그들과 지금 같이 해먹은 현직들 때문에 피곤하게 됐어, 이러다 다음에 우리가 해먹는데 지장 있는 것 아니야, 아무래도 재벌 비리 수사 같은 것으로 관심을 돌려야겠어, 아무튼 앞으론 홍 선배와 진 선배의 수법을 적절히 배합하는 지혜가 필요해...

그런데 그들이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고시공부를 하며 외롭게 법전을 뒤적이고 시험문제를 풀어보던 20대부터 언젠가 40대가 되면 검사장이 되고 그러면 비상장회사의 주식을 거저 얻을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혹은 특수통이 되어 수사를 하면서 각종 재산 은닉과 탈세 기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권력을 가진 고위 공직자로 살았으면 비상장 회사를 이용하든 전관예우를 활용하든 수십억 또는 수백억의 보상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은 또 어디서 온 것일까? 검사나 변호사로 산다는 것은 범죄와 싸우는 것이기보다 범죄와 멋들어진 미뉴에트를 한판 추는 것이라는 '깨달음'에는 대체 언제 도달한 것인가?

나는 내 동시대인들인 이들이 처음부터 '악당'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의 비루한 모습은 삶의 어느 길목에서 일체의 가치들이 무너져 내렸던 탓일 게다. 아마도 그들의 심리적 과정은 이랬을지 모른다. 살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크게 다가온다. 살면서 너무 많은 타협을 했다. 묘비명에 오직 검사로서 명예롭게 살았다고 새기기를 앙망하기에는 이미 살아온 행적이 남루하다. 설령 남은 삶을 다 바쳐 명예를 일구자 한들 내 묘비명을 읽어줄 친구와 동료와 이웃과 후배와 후손들의 천박함은 또 어쩔 것인가?

하지만 이런 허무주의는 그저 정신의 나약함을 드러낼 뿐이다. 평론가 강경석이 어딘가에 적었듯이 "일체의 무기력과 체념, 그리고 냉소와 혐오는 투항의 사전절차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디에 투항한 것일까? 이른바 '주류'에 투항한 것일 텐데, 그 속내는 때 묻은 습관, 더러운 관행, 돈과 권력과 거기에 굽실거리는 이들을 보는 즐거움, 세상을 속여 넘긴 영리함에 대한 자족감... 이런 너절한 것들과 다름없는 듯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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