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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강간한 범인은 술이 아니다"

이제 교사 성폭행 사건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남성 세 명에겐 중형이 선고될 것이다. 만약 '교사, 학부모, 섬마을'이란 키워드를 뺀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달 대전고법은 또래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중학생 10명 전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깼다. "나이가 매우 어리다"며 3명의 형량을 깎고 나머지 7명은 가정법원 소년부로 보낸 것이다. 지난 1월 인천에선 술에 취해 잠든 10대 여성을 성폭행한 20대 4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에는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해 후배를 성폭행한 대학생 3명이 항소심에서 징역 4~6년에서 징역 3~5년으로 감형됐다.

  • 권석천
  • 입력 2016.06.15 07:30
  • 수정 2017.06.16 14:12

"'강간 피해자(Rape Victim)'라고 적힌 서류에 사인을 하고 검사를 받았어. 몇 시간 후 샤워를 했어.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내 몸을 보았어. '이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야.' 무서웠어. 내 몸을 재킷처럼 벗어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병원에 놔두고 오고 싶었어."

경험하지 않고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남성인 나는 성폭행 당한 여성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단지 짐작할 뿐이다. 그 인식의 한계를 알면서도 '에밀리 도우'란 가명으로 불리는 23세 미국 여성의 용기에 몇 자 적고자 한다.

"모든 걸 잊어 보려고 했어. 말을 할 수 없었고, 먹지 못했고, 잠들지 못했어. 퇴근 후 소리 지를 수 있는 곳을 찾아가곤 했어. 어느 날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봤어. '그는 여성이 성관계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원했다고?"

지난해 1월 17일 동생을 따라 파티에 갔던 에밀리는 다음날 새벽 스탠퍼드대 캠퍼스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다. 범인은 대학 수영선수 브록 터너(20). 에밀리는 법정에서 터너를 향해 7244 단어의 진술서를 읽는다. 판사는 지난 2일 징역 6월, 보호관찰 3년의 가벼운 처벌을 한다. 뒤이어 터너의 아버지가 '20년 인생에서 20분간의 행동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가혹하다'는 탄원서를 낸 사실이 드러난다.

"성폭행은 사고가 아니야. 너는 '술에 취해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없었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고 했지. 술은 변명이 될 수 없어. 내 옷을 벗기고, 나를 만지고, 내 머리를 땅에 질질 끌었던 건 술이 아니야."

이제 교사 성폭행 사건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남성 세 명에겐 중형이 선고될 것이다. 만약 '교사, 학부모, 섬마을'이란 키워드를 뺀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달 대전고법은 또래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중학생 10명 전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깼다. "나이가 매우 어리다"며 3명의 형량을 깎고 나머지 7명은 가정법원 소년부로 보낸 것이다. 지난 1월 인천에선 술에 취해 잠든 10대 여성을 성폭행한 20대 4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에는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해 후배를 성폭행한 대학생 3명이 항소심에서 징역 4~6년에서 징역 3~5년으로 감형됐다.

"너는 내게서 삶의 가치, 사생활, 열정, 시간, 안전함, 친밀감, 자신감, 나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았어. 네가 평판을 걱정하고 있을 때 나는 매일 밤 숟가락을 냉장고에 넣어둬.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눈물로 눈이 부어 있거든...."

판사들은 "죄질이 나쁘다" "피해가 심각하다"면서도 초범, 반성, 학생이란 이유로 정의를 선언하지 않는다. 조두순 사건 이후 음주 감경을 할 수 없게 되자 음주 성범죄에 '우발적'이란 딱지를 붙인다. 법전을 펼치면 강간은 '3년 이상 유기징역', 강간 등 상해·치상과 2명 이상 강간은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이다. 판사들은 양형(형량 결정)기준 뒤에 숨지 말고 국회가 만든 법대로 선고해야 한다. 1심에서 고심하며 선고한 형량을 항소심에서 줄이는 일도 없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매일 당신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니 절대 싸움을 멈추지 말아 주세요. 작가 앤 라모트가 말했듯 등대는 배를 구하기 위해 배가 가는 길을 늘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서서 빛을 비출 뿐이죠. 저는 희망합니다. 당신이 한 줌의 빛을 품은 사람이기를. 당신이 침묵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를."

글은 힘이 세다. 에밀리가 쓴 편지의 힘으로 한국의 남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강간범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함께 숨 쉬고, 웃고, 떠들며, 분노하던 친구, 동료·선후배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의 그림자다. '순간의 실수' '충동을 못 이긴 사고'라고 안타까워하고 "여자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수군대는 마음에서, 성폭력을 욕하면서 즐기는 그 마음에서 성범죄는 자란다. 남성들에게도 한 줌 빛이 있다면 그것은 한때의 분노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반성, 여성을 대상화하는 문화에 등을 돌리는 연습에서 시작될 것이다.

10일 오후 전남 목포경찰서에서 신안 교사 성폭행 피의자 3명이 호송차에 오르기 위해 경찰서를 나오고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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