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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와 원작을 공유한 BBC의 드라마 ‘핑거스미스'

수전 트린더(샐리 호킨스)는 고아였다. 엄마는 홀로 그녀를 낳은 뒤 한 남자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수전은 버려진 아이들과 범죄자들과 가난이 지배하는 런던 뒷골목에서 좀도둑 ‘핑거스미스’로 자라난다. 모드 릴리(일레인 캐시디) 역시 고아였다. 엄마는 그녀를 낳다 죽었고 아버지는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모드는 시골의 어둡고 오래된 대저택에서 삼촌과 외롭게 살아간다. 계급은 다르지만 운명은 너무도 닮은 두 여성이 하녀와 주인으로 만나면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인 음모와 어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드라마 <핑거스미스>는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얼마 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덕분에 그 원작 소설인 <핑거스미스>가 새삼 큰 조명을 받으면서 10년 전에 발표된 드라마도 더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의 한계 탓에 원작의 복잡한 내용은 다소 축소되었으나 핵심적인 매력만은 그대로 유지된 드라마다.

<핑거스미스>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치밀하게 설계된 다중 플롯의 쾌감에 있다. 음험한 대저택 브라이어의 수많은 문들만큼이나 겹겹이 둘러쳐진 비밀과 대도시 뒷골목의 셀 수 없는 골목길처럼 굽이굽이 숨겨진 사연들은 수전과 모드가 주도하는 이야기의 시점이 바뀔 때마다 한 꺼풀씩 실체를 드러내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플롯의 다층적 매력은 미스터리 추리물로서 장르적 쾌감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역사물로서 주제의식과도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 숨겨진 플롯 자체가 여성들의 감춰진 역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령 수전과 모드가 고아라는 설정은 문자적 의미를 넘어 여성들의 계보를 인정하지 않는 역사의 고아라는 의미를 지닌다. 작품은 수전과 모드의 이야기를 어머니들의 사연과 함께 바느질하며 남성 중심의 역사가 거세하고 억압한 여성들의 고통을 명시화한다.

여기에 레즈비언 로맨스 플롯이 더해지면서 드라마는 더 흥미로워진다. 수전과 모드의 사랑은 각자가 감춘 음모 외에도 여성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중의 억압으로 인해 수난을 겪는다. 극 중에서 여성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은 남성들이 즐기는 포르노 소설 속뿐이다.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거나 대리자로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그 레즈비언 포르노를 전유하며 욕망을 해방시키는 순간은 이 작품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다.

요컨대 <핑거스미스>는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 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에는 ‘어머니의 유산’을 둘러싼 소동극으로 정리되는 이 작품에서 진정한 유산은 어머니들의 아픈 역사이며 그 상처를 공유한 여성들의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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