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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부재가 진정한 국가위기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가나 대학의 이공계나 인문사회계 모두 기본 개념은 선진국에서 배운 것을 쓰고, 한국은 모방과 적용에만 치중하자고 유도했다. 현재 한국의 경제학 박사 1,599명 중 해외박사는 1,162명이고, 서울 주요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의 거의 전원이 미국 경제학 박사다. 추상적인 이론이나 기본개념은 '대국'이 만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주변부에서는 그곳에서 만든 지식을 소비하는 전형적인 지식 하청 주변부 국가의 모습이다. 선진국이 과연 수백 년의 경험적 축적, 자유로운 학문적인 토론, 그리고 장기 투자를 통해 얻는 지식을 '조건 없이' 가르쳐 주고 이전시켜 주던가.

  • 김동춘
  • 입력 2016.06.01 07:18
  • 수정 2017.06.02 14:12
ⓒGettyimage/이매진스

〈축적의 시간〉에서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한국 산업기술의 위기는 '축적된 경험'에 기초한 '개념설계 역량'이 없는데 기인한다고 말한다. 즉 한국은 선진국의 개념을 모방 개량에서 성장을 추구한 점에서 성공한 나라라 할 수 있지만, 이제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개념설계 역량이 없이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산업이든 대학이든 모방과 차용만으론 한계

한국의 국가나 대기업이 모방·개량이 아닌 독자적인 개념설계 기반을 구축했어야 할 시기는 90년대 중·후반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라는 큰 환란을 맞이한 이후 한국의 국가와 대기업은 단기적인 생존과 경쟁력 강화에 더 매달렸다. 그래서 거시 산업정책을 구상하고 개념설계 역량을 구축하여 기술도약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조립가공형 산업체질을 유지한 채, 만만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쥐어짜 비용을 절감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였다.

그 결과 거대한 내수시장 덕분에 빠르게 기술축적을 한 중국에 거의 추월당했으며, 축적된 지식을 가진 서구 국가들과의 거리는 거의 좁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반도체, 조선, 자동차 몇 개 산업, 그리고 10대 재벌 대기업에만 온 국가적 부가 집중되었고, 그 이하 모든 기업, 모든 산업, 모든 노동자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국가는 재벌대기업의 R&D에 막대한 세제 혜택을 주면서 지원하고 있으나, 정작 한국에 Research 는 없고, Development도 아닌 Design만 있다는 비판도 있다. 대기업도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위한 장기 연구투자를 하기보다는 모방·개량을 하거나 자체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을 집어먹는 것이 더 편했는지 모른다.

산업 분야에서 추상적인 개념설계 역량이 약한 이유는 당장의 실적을 요구하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 정책과 그에 편승한 교수나 연구자들의 용역 수주 경쟁의 결과라는 지적이 많다. 지금 교육부에서 추진하는 '사회수요맞춤형 인재양성'(PRIME, Program for Industry Needs Matched Education)은 산업의 요구대로 교육을 개편하겠다는 것인데, 대학 인문계 정원을 줄이는 조건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학부생이 공대생이 되면 취업률이 높아질지도 의심스럽지만, 이 사업은 개념설계, 개념 수립을 지향하는 학과나 학문은 없애겠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독자적인 개념 구축 능력을 갖춰야

지금까지 한국의 국가나 대학의 이공계나 인문사회계 모두 기본 개념은 선진국에서 배운 것을 쓰고, 한국은 모방과 적용에만 치중하자고 유도했다. 현재 한국의 경제학 박사 1,599명 중 해외박사는 1,162명이고, 서울 주요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의 거의 전원이 미국 경제학 박사다. 추상적인 이론이나 기본개념은 '대국'이 만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주변부에서는 그곳에서 만든 지식을 소비하는 전형적인 지식 하청 주변부 국가의 모습이다. 선진국이 과연 수백 년의 경험적 축적, 자유로운 학문적인 토론, 그리고 장기 투자를 통해 얻는 지식을 '조건 없이' 가르쳐 주고 이전시켜 주던가.

〈축적의 시간〉에서는 개념설계 역량이 없이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창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인문·사회과학 이론과 개념이 없이는 지적 문화적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물론, 문화 콘텐츠의 기반을 고갈시켜 세계의 주도산업인 서비스 분야의 후진국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의 미국 유학생 수를 자랑하는 한국은 매년 7조원 이상의 돈을 미국 교육기관에 갖다 바친다. 한국의 인문학이 중국문화의 일부로 흡수되고, 사회과학이 미국 발 신자유주의 이론의 모방 가공품으로 남아있다면, 한국의 문화, 관광, 교육의 정체성과 경쟁력은 아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선진 지식의 학습이나 교류, 그리고 지식의 보편성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경제력만큼의 독자적인 개념 구축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지식 후진국 한국의 현실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독자의 개념과 이론, 자기가 서 있는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나온 자생적 지식 없이는 당장 산업의 위기도 극복할 수 없고, 장기적인 국가 발전도 기약할 수 없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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