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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대 정신질환'이라는 잘못된 구도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법리적으로 판단하려는 경찰의 해석과 사회적 요인으로서의 여성혐오를 강조하는 해석이 그 자체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법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 사건을 이해한다면, 후자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요인에 주목한다. 요컨대 두 입장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 케이스에서는 양립가능하다. 경찰은 사회적 설명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며 그럴 의도를 갖지도 않기에, 경찰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것을 이유로 사회적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분야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 이우창
  • 입력 2016.05.31 12:02
  • 수정 2017.06.01 14:12
ⓒ연합뉴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피해자 추모글을 쓴 뒤에 받은 반론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이미 경찰에 의해 정신질환범죄로 판명된 사건을 여성혐오와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양성 간 갈등을 조장한다. 이후 지금까지 이 사건을 두고 벌어진 여러 건의 논쟁에서 비슷한 대립구도, 즉 "강남역 사건은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다"와 "강남역 사건은 정실질환으로 인한 범죄다"의 두 입장 사이의 충돌이 나타난다(그리고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극단적인 이들은 "비합리적인 극단적 여성주의자들이 경찰의 합리적인 판단을 거부한다"는 프레임을 유포하고 있는데, 서구 근대 문헌을 읽는 입장에서는 여성과 비합리성을 동일시하는 구도 자체가 아주 오래된 여성혐오적 관점임을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 있다). 26일 오후에는 정부와 집권여당이 강남역 살인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조현병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는 행정입원명령이 실효성을 거두도록 법적 근거 마련을 추진"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 사건을 여성혐오와는 무관한 특정 정신질환의 문제로 바라봐야만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기세를 얻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즉 강남역 살인사건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라는 경찰의 주장과 이 사건이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라는 주장은 양립할 수 없으며, 전자를 신뢰해야 하는 만큼 후자는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가해자의 정신질환에 초점을 맞춰 이 사건을 판단하고자 하는 경찰의 '법리적' 해석과 가해자의 행위에 사회적 요인으로서의 여성혐오담론이 끼친 영향에 초점을 두는 (나를 포함한) 여러 이들의 '사회적' 해석은 양립가능하다. 엄밀히 말해 경찰의 해석은 여성혐오담론의 역할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의 타당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이 지점에 관해 나는 몇몇 법 관련 종사자에게 문의했으며, 그들의 답변에 감사드린다. 물론 그들의 답변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든 실수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경찰의 해석을 단순하게 정리해보자. 가해자가 여성 일반에 대해 일종의 피해망상을 품게 되고 이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일차적인 원인은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한 정신질환이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경찰의 해석이, 가해자의 정신상태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갖추었다는 전제 하에서, 나름의 법적 타당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그가 심지어 대통령을 포함한 유력인사를 공격한 경우라고 해도 법적으로 정신질환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고려되는 것은 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를 떠올려 본다면, 한 여성이 주변 남성들과의 불화로 인해 남성 일반에 대한 극심한 피해망상에 빠져 여러 남성을 무작위로 살해한 경우에도 경찰은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에 의한 살인이라고 판정할 것이고, 우리는 그 판단에 나름의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정신질환의 책임경감범위를 특히 혐오범죄에서 어디까지 인정하는 게 맞는지 등의 논쟁적인 주제는 일단 넘어가자).

반면 사회적 요인으로서 여성혐오를 주목하는 해석은 이 사건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에게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에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가해자는 자신이 여성에게 여러 차례 거부당했다는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인식에 근거해 불특정 여성을 살해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가해자의 사고는 자신이 대면하는 사람을 특정한 성별에 따라서만 범주화하고 그 성별에 따라 위해를 가해도 된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의 한 전형을 따르고 있다. 이 사건에서 여성혐오를 강조하는 입장은 가해자의 사고가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여성혐오적 편견을 극단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설령 정신질환에 의해서라고 해도 그가 여성혐오적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극단화하여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 사건의 중요한 사회적 원인으로 한국의 여성혐오를 추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법리적으로 판단하려는 경찰의 해석과 사회적 요인으로서의 여성혐오를 강조하는 해석이 그 자체로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법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 사건을 이해한다면, 후자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요인에 주목한다(에밀 뒤르켐이 <자살론>을 출간한 지 거의 120년이 된 시점에서 사회적 요인이 개별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요컨대 두 입장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 케이스에서는 양립가능하다. 경찰은 사회적 설명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며 그럴 의도를 갖지도 않기에, 경찰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것을 이유로 사회적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분야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든 아니든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거나 정신질환여부를 무시하고 극형에 처하자는 주장에는 (물론 이처럼 격한 감정적 표현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들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좀 더 낫다는 합의를 내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경찰의 입장을 근거로 어떻게든 여성혐오 문제를 시야 밖으로 추방하려는, 유감스럽게도 여러 남성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그건 위에 보여주었듯 잘못된 논리에 기초하고 있을뿐더러,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다는 점에서 맹수 앞에서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 모른 척하는 새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태를 합리적으로 직시하고 개선해나가려는 태도지 지금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바꿀 것도 없다는 식의 비합리적 망상이 아니다. 경찰의 판단과 여성혐오적 해석을 마치 대립되는 것처럼 배치시키는 지금의 쓸모없고 해롭기만 한 전선에 발이 묶여 실제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해서는 안 된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BeGray]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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