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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차여도 괜찮아

당장은 자존심도 상하고 가슴도 아프다. 실연은 매번 그렇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느덧 돌아보면 성큼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염두에 둘 것은 있다. 섣불리 관계에 환상을 대입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야말로 평생을 기다려왔던 존재라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이. 평생을 기다릴 만한 존재는, 어쩌면 그 모든 관계를 통해 거듭날 나 자신이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차여도 괜찮다. 만일 연애에 갑이 있고 강자가 있다면, 관계의 결과에 절박하지 않고 관계 자체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 이서희
  • 입력 2016.06.01 11:57
  • 수정 2017.06.02 14:12
ⓒgettyimagesbank

이제 곧 중학생이 될 딸이 느닷없이 물었다.

"엄마, 남자한테 차인 적 있어?"

"당연하지."

"정말?"

"응."

"어땠어?"

"너, 지난번에 엄마가 준 열쇠 잃어버린 거 생각나?"

"응."

"뉴욕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폭설 때문에 비행기 못 떠서 묶여 있었던 것도?"

"응."

"살다 보면 벌어지는 일들이 있어. 남자한테 차이는 것도 그런 거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돼."

"자존심 상하잖아."

"열쇠도 잃어버리는데, 사람 마음 잃는 거는 얼마나 더 쉽겠니. 눈이 많이 내리면 비행기도 못 뜨는데, 사람 마음은 날씨보다 더 알 수 없는데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겠니.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일일이 자존심을 걸고 살다 보면 자존심은 남아날 일이 없어."

이어서 말했다. 내가 멍청해서도, 내가 모자라서도, 열쇠를 잃어버리고 갑자기 폭설이 내리는 건 아니라고. 중요한 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일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지 말자고. 살면서 떠나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일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실연뿐만 아니라 죽음, 집단에서의 소외, 직장에서의 해고 등등, 거절당하는 일을 삶에서 모조리 피할 수는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가이 윈치Guy Winch는 테드TED 강연에서 "거절은 왜 아플까"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소셜 미디어에의 노출이나 넓어진 생활 반경으로 거절의 횟수는 늘어났지만, 아픔의 정도는 여전하다. 뇌는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거절로 인한 고통에 강렬하게 반응한다. 이는 바로, 원시 수렵 채집 시절부터 인간이 익혀온 생존 본능에서 연유한다. 집단에서 버려지는 것은 바로 생사여부와 연결되는 문제였기에 우리의 뇌는 관계에 민감하다. 그가 제시하는 거절의 아픔에 대처하는 방법 중 다음과 같은 분석이 무척 와 닿았다. 우리는 환경이나 특정 상황, 시기의 문제를 너무 쉽게 개인의 문제로 해석한다. 단지 정황상 맞지 않았을 따름인데, 내가 모자라서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겨눈다. 그가 강조하는 대처법은, 거절의 원인을 무작정 자신에게 돌리고 자책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미래를 바라보며 계획을 세우고 거절당한 사람이나 집단이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지며,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권유한다.

살면서 종종, 지나친 자책의 폭력성에 움찔하는 때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원인을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려 위기를 모면하려는 집단적 마녀사냥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부당하게 잔혹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 내 안의 폭력성은 상대만 달리하면 내가 아닌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 그것도 가장 약하고 가장 간편한 상대를 제물로 찾는다. 많은 경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지만.

중요한 건 존중이다.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존중한다. 그리고 존중의 습관은 나도 당신도 그 누구도 혐오하지 않고 부당히 비난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나아가 문제를 범주화해서 바라보면 좋다. 원인을 제거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당장의 상황은 완료되었으나 미래에도 비슷한 정황이 반복될 수 있는지 나누어 생각하면 좋다. 슬픔에의 애도는 필요하나 상황을 관찰하고 판단, 실천하는 기능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라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여 행동하고 후자의 경우라면 훗날 새롭게 대응할 실질적 방법을 세우는 걸로 자책의 에너지를 돌린다. 반성과 자책은 다르다. 반성은 자신과 환경, 이들의 관계를 응시하는 성찰이며 미래를 향한 움직임의 첫 발이다. 자책은 자신을 때려눕혀 과거의 링 안에서 쓰러지게 한다. 자책의 에너지를 반성으로, 나아가 자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힘으로 사용하는 편이 좋다.

아이에게 말했다.

"누가 너를 떠나더라도 너는 여전히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관계의 변화 때문에 네 가치가 결정되는 일은 없어.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중요한데, 그건 바로 너를 어떻게 소중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어. 그리고 상대방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정성껏 마음을 다해야 하지. 그런데 열쇠를 잃듯, 갑자기 폭설이 내리듯, 마음을 다해도 진전되지 않는 관계도 있단다. 그럴 때에는 과감히 떠나거나, 떠나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게 필요해. 관계에서 중요한 건, 누가 누구를 먼저 떠났느냐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지냈는가, 란다. 만일 연인의 마음이 먼저 변한다고 해도 그건 네가 매력적이지 않거나 가치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이어서 나를 뻥 차고 떠나버린 한 남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가 푹 빠져서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석 달 만에 나를 두고 옛 애인한테 가 버렸어. 먼저 열렬히 다가와서 엄마가 마음을 열었던 사람인데 말이야. 그 여자는 자기 아니면 안 된다나. "

"정말? 그래서 어떻게 했어?"

"잘 가라고 했지. 사실 그의 말이 맞지. 그 남자든 다른 남자든, 엄마는 누군가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런데 이건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래. 다른 누군가로 내 존재가 죄다 결정되는 일은 없어."

당장은 자존심도 상하고 가슴도 아프다. 실연은 매번 그렇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느덧 돌아보면 성큼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염두에 둘 것은 있다. 섣불리 관계에 환상을 대입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야말로 평생을 기다려왔던 존재라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이. 평생을 기다릴 만한 존재는, 어쩌면 그 모든 관계를 통해 거듭날 나 자신이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차여도 괜찮다. 만일 연애에 갑이 있고 강자가 있다면, 관계의 결과에 절박하지 않고 관계 자체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여성중앙 2016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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