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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히로시마에 가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과연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찾아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도덕적 우위'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덮어주기는커녕 일본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적 일탈행위는 앞으로 더욱 발붙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히로시마 방문이 끝나면 아베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하여 진솔한 사죄를 할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질 것이고, 그 후에는 아시아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실한 태도를 보일지가 초점이 될 것이다.

  • 조세영
  • 입력 2016.05.27 14:54
  • 수정 2017.05.28 14:12
ⓒASSOCIATED PRESS

개인이 모인 사회도 모순이 많기는 하지만 국가들이 모인 국제사회는 더욱 심한 모순 덩어리다. 미국의 모순은 세계 최강의 핵무기 보유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발효된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NPT 조기 비준을 촉구하면서도 수면하에서는 비준을 서두르지 말라고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한 달 앞두고 1972년 1월 미일 정상회담을 개최한 닉슨 대통령은 사토 총리에게 '비준은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고 하면서, '잠재적 적국을 걱정하도록 만드는 게 좋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2014년에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마셜 군도가 9개 핵무기 보유국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핵보유국들이 핵군축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한다고 약속한 NPT 제6조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이유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프라하 연설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호소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면서도 마셜 군도의 제소에 대해서는 재판을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의 모순은 유일한 핵무기 피폭국으로서 핵 폐기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미국의 핵우산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토 총리는 비핵 3원칙을 천명한 업적으로 1974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일본이 비핵의 아름다운 이상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핵 억지력에 의한 안전보장 덕분이었다.

심지어 일본이 미국의 핵군축 노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도 있었다. 2009년 전술핵의 탑재가 가능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퇴역시키려는 미국에 대해 일본이 재고를 요청했다는 보도가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의 일방적인 핵군축으로 핵우산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해 로비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핵 폐기의 이상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핵무기의 억지력에 안보를 의존해야 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도 프라하 연설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아마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억지력의 측면만 강조해서는 현실은 관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를 열어갈 수는 없다. 몽상가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누군가는 평화와 핵 폐기의 이상을 소리 높여 말해 주어야 한다. 프라하 연설 한마디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이후 7년 동안 핵 군축을 위한 뚜렷한 성과도 없었고 자신의 임기 말을 장식하기 위해 히로시마를 선택한 데 불과하다고 오바마를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일방주의적인 군사력의 행사를 자제하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부르짖는 이 고민 많은 지도자가 있기에 역사의 작은 진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원폭을 투하한 나라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피폭지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은 햄릿형 인간이라고 비웃음을 사는 오바마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트럼프든 힐러리든 그의 후임자 자리를 노리는 후보들은 자신이 햄릿형과는 다른, 단호하고 강력한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그들이 이끄는 세상은 강경론과 일방주의가 득세하기 쉬운 반면, 핵 폐기와 히로시마 방문을 두고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과연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찾아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도덕적 우위'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덮어주기는커녕 일본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적 일탈행위는 앞으로 더욱 발붙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히로시마 방문이 끝나면 아베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하여 진솔한 사죄를 할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질 것이고, 그 후에는 아시아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실한 태도를 보일지가 초점이 될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우리는 과연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를 깊고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비핵화의 문제는 절박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안전보장의 차원에서 억지력의 균형을 고민하는 것이지 핵무기의 비인도성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다보니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발언이 나오자마자 핵무장과 같은 이야기가 너무나 쉽게 등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도 핵무장론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이 없어지고 한미동맹에 차질을 초래하며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실리적인 측면에서 손해가 더 크다는 현실적인 고려가 대부분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가해와 피해라는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전쟁과 평화, 그리고 핵무기와 인도주의라는 차원에서 깊이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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