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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0년대 말 몽골에 '식민지' 건설 시도했다

  • 김수빈
  • 입력 2016.05.25 13:59
  • 수정 2016.05.25 14:00
북한과 몽골의 대표들이 2013년 10월 평양에서 협력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북한과 몽골의 대표들이 2013년 10월 평양에서 협력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KCNA KCNA / Reuters

1968년 5월 8일. 산업, 농업, 지질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북한의 경제시찰단이 몽골을 방문했다. 양국 간 광산 채굴과 소금 채취 등의 경제협력을 위한 시찰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찰단의 행동은 조금 이상했다. 그들은 '북한과 가까운 지역'을 강조하면서 몽골 국토의 거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몽골 관계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다.

시찰단은 마침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50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적임지를 찾았다. 몽골 관계자들은 북한의 본심을 알게 되자 경악했다.

북한은 단지 일꾼과 기술자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가족까지 약 8만 명의 인원을 지역에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몽골 정부에게 이주민들이 정착할 때까지 식량과 숙소를 제공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북한은 해당 지역에서 나는 석탄과 소금, 목재를 채취하는 대가로 일정액을 몽골 정부에 지급하는 대신, 해당 지역에서 북한 이주민들이 추가적으로 영위하는 어업이나 수렵, 기타 원자재 채취 등을 비롯한 어떠한 경제적 행위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허가할 것을 요구했다.

거의 '식민지' 건설과 다름없는 이러한 경제협력 계획을 몽골 측이 반겼을 리 없다. 이러한 사업은 북한에만 일방적으로 이로울 것이었으며 8만 명이나 되는 북한 주민들의 이주는 정치적으로도 부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었다(1968년 몽골의 인구는 약 120만 명이었다). 몽골은 적당히 북한의 요청을 묵살했다.

발라즈 샬론타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경제민족주의'에 관하여 최근 NK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경제민족주의가 극단으로 나타난 사례로 위 사례를 소개했다.

통상적으로 북한과 몽골의 외교관계는 오랫동안 우호적이었고 몽골이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1990년부터 악화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샬론타이 교수는 북중 관계, 북소 관계와 마찬가지로 북한-몽골 관계 또한 50년대부터 외교상황에 따라 냉각기와 해빙기를 오갔다고 설명한다. 그는 북한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몽골이 결국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 데에는 북한의 극단적인 경제민족주의에 대한 몽골의 반발도 한몫했다고 썼다.

샬론타이 교수는 북한의 경제민족주의가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경제는 일본 제국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육성됐고 그러 인해 특정 산업 부문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 산업 불균형이 심각했다는 것.

"김일성은 이러한 경제적 구조를 자족적이고 내수지향적인 산업화 모델로 대체하고자 했다"고 샬론타이 교수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제 정책은 실패했다.

북한의 경제민족주의는 무역을 서로가 이득을 보는 행위라기 보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보았기 때문에 경제협력의 대상인 외국의 국익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고 샬론타이 교수는 지적한다. 북한의 몽골 내 '식민지' 건설 계획은 북한의 그러한 특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경우였다.

샬론타이 교수는 북한의 경제민족주의가 북한의 경제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몽골과 같은) 경제적 파트너가 북한보다 훨씬 약했을 경우 북한의 경제민족주의는 특히 착취적인 형태를 띨 수 있었다. (중략) 북한의 경제민족주의는 구체적인 경제 문제(일제강점기로 인한 산업불균형)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이해가 가능한 것이지만 결국 북한에 도움이 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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