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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하벨인가

"정치는 책임감과 존재의 복잡성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담당해야 한다. ...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치는 계속 단순한 기술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치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치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배명복
  • 입력 2016.05.25 13:11
  • 수정 2017.05.26 14:12
ⓒASSOCIATED PRESS

긴 글을 외면하는 세상이다. 유통과 소비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소셜미디어의 짧은 글에 익숙해져 신문조차 안 읽는다. 이 마당에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만용이자 망발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두 권의 책을 '강추'하는 것으로 오늘 칼럼을 대신하고자 한다. 비난과 조소가 두렵다고 권독(勸讀)을 자제하기에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암담해 보인다.

먼저 소개하는 책은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인 박영신 박사가 2000년에 출간한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라는 책이다. '바츨라프 하벨의 역사 참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16년 전에 나온 이 책을 나도 최근 처음 읽었다. 지난주 경희대 미래문명원이 박 교수를 초청해 '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를 주제로 2016년 '미원 렉처'(경희대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특별강연)를 진행하면서 기자를 토론자 중 한 명으로 불렀고, 그 바람에 숙제하듯 읽게 됐다.

의무감에서 시작했지만 진도가 나갈수록 그 내용에 빠져 줄 쳐 가며 탐독하게 됐고, 반드시 이 책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새로운 의무감 속에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됐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에서 대통령으로 변신한 하벨의 정치철학에 주목한 박 교수의 안목과 그 요체를 예리하게 짚어낸 학자적 경륜에 탄복하면서 우리 사회에 이런 분이 있는 한 아직 희망은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진 이 시대에 새삼 하벨에 초점을 맞춰 강연회를 기획한 경희대 측의 감식안에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또 한 권의 책은 강연회에 맞춰 경희대가 출간한 『불가능의 예술』이란 책이다. 1989년, 체코의 탈(脫)공산 무혈혁명인 '벨벳 혁명'으로 운명의 장난처럼 대통령이 된 하벨이 재임 중 직접 작성한 35편의 연설문을 모아 번역한 책이다. 정치에 대한 그의 철학과 세상에 대한 인식, 인간과 문명에 대한 성찰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체제 지식인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현실 정치인이 된 하벨이 느꼈을 곤혹스러움은 카프카의 변신만큼이나 부조리했을 것이다. 현실과 끝없이 부닥치면서도 그는 자신을 반체제 저항인사로 만든 정치적 이상주의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치는 양심과 진리를 토대로 삼아야 하고, 인간을 위한 이타적 봉사로서 실천도덕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의 정치가 아니라 도덕과 양심의 정치, 그 자신의 표현으로 '비(非)정치의 정치'가 진정한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는 책임감과 존재의 복잡성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담당해야 한다. ...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치는 계속 단순한 기술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치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치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92년 4월, 도쿄 아사히홀 연설)

하벨은 자연과 우주의 초월성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이야말로 정치인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자신감과 오만은 다르다는 것이다. 냉정하고, 거들먹거리고, 천박하고, 거짓말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판에 꾀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후에 남는 것은 옳고 그름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도덕적 감수성과 예의, 좋은 취향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프라하의 봄'으로 일컬어진 68년 체코의 민주화운동은 소련군의 탱크 앞에서 힘없이 시들었다. 그 후 체코를 지배한 것은 무미건조한 '후기 전체주의' 사회였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큰 탈 없이 먹고살 수는 있는 체제였다. 최소한의 안락을 보장받는 대가로 사람들은 진실한 삶에 대한 책임감을 내동댕이친 채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이어 갔다. 체제와 유리된 이런 삶을 하벨은 '거짓 속에서의 삶'으로 규정하고, 저항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그런 체제에 냉소를 보내고, 유배의 삶을 택한 쿤데라와 하벨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박 교수는 정치가 정치꾼의 손에 맡겨지고, 권력이 숫자를 지배하는 관료에 의해 조정되면서 모두가 물질 획득의 일상에 매몰돼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역시 후기 전체주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귀차니즘'과 '먹고사니즘'의 노예가 되어 정치판을 외면하는 데서 도널드 트럼프 현상 같은 미국 민주주의 위기나 계파 간 권력 싸움으로 대변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벨과 같은 지식인의 적극적 정치 참여와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근혜 이후를 꿈꾸는 정치인들, 또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두 권의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백문(百聞)이 불여일독(不如一讀)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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