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성혐오'의 다층적 얼굴들 | 역삼동 공용화장실 살인사건

내가 이번 살인사건의 논의에서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묻지마 살인'인가 '여성혐오살인'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적 논의방식의 한계이다.이 양자택일이 위험한 이유는 이 두 축 사이의 얽히고설킨 복합적 관계성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 '여성혐오'에 대한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가 마치 살인이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실행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얼굴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은밀한 방식으로도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매우 우대해주는 것 같은 소위 '신사도'의 근원적인 인식의 출발점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즉,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이해) 은밀한, 그러나 강력한 '여성혐오'이다.

  • 강남순
  • 입력 2016.05.21 17:48
  • 수정 2017.05.22 14:12
ⓒ연합뉴스

1.

역삼동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묻지마 살인'인지 '여성혐오살인'인지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모 신문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고문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이번주간 서머코스(intensive course) 강의를 하고 있고, 써야 할 논문과 강연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이나 SNS를 잠간 살펴보면서, 이 논의의 방향 자체가 우려스럽게 생각되어 짧게라도 단상을 나눈다.

우선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인가 또는 '여성혐오 살인'인가 라고 묻는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선 그 가해자는 이미 소위 '묻지마 살인'을 했다. 동시에 불특정 다수 중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을 타깃으로 했다. 그것이 '우연성'이든 '고의성'이든 그 생물학적 여성을 자신의 폭력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이미 '여성혐오'의 결과물이다. 자신 스스로 나는 '여성혐오자가 아니다'라고 하든, 경찰조사가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지의 상관없이, 그는 여성을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또는 함부로 하고 싶은 존재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미 '여성혐오'를 작동시킨 것이다. 따라서 양자택일적 논의 방식은 불필요한 '편가르기'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할 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성혐오'가 어떻게 수 많은 다층적 얼굴을 지니고 있는가를 사회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2.

'여성혐오 (misogyny)'라는 개념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inferior being) 라는 것; 둘째, 여성은 위험한 존재(dangerous being), 즉 남성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여성에 대한 인식은 노골적인 비하, 배제, 증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매우 은밀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누가 '여성혐오사상'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세계에서 드러내는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치밀한 비판적 분석과 조명이 요청된다.

3.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은 누가 '여성혐오' 사상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흔히 '남성'만이 여성을 열등하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으로서의 여성혐오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혐오 사상'으로부터 면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즉 여성혐오가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사는 여성들은 가부장제적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 가부장제적 사회는 여성의 열등성과 남성을 유혹하는 유혹자로서의 위험성을 지닌 존재라는 여성혐오사상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면서 유지된다. 따라서 남성만이 여성혐오사상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여성혐오사상을 내면화한다.

4.

페미니스트 연구에서 보여진 바, 자신의 수술을 주도하는 의사, 비행기의 기장, 자신의 교회의 담임목사등 소위 '지도자'로서 누구를 원하는가를 물으면 다수의 여성들이 '남성'을 원한다. 그들 속에 '어쨋든 (somehow)' 남성이 여성보다는 더 '믿음직'하고 실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여성혐오의 자취이다. 강간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강간의 희생자인 여성에게, 여성들이 우선 묻는 것도 '네가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또는 무슨 옷을 입었기에 그런 일을 당했는가'이다. 즉 남성의 '유혹자'로서의 '위험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여성들 속에서도 잠재하여 있다. 이렇게 '여성혐오'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또는 노골적인 방식으로 우리 현실에 침투하여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딸들, 어머니들, 할머니들은 이러한 여성혐오를 내면화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여성혐오의 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다. 21세기 한국 드라마들은 여전히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 의한 여성혐오의 다층적 얼굴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5.

내가 이번 역삼동 살인사건의 논의에서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묻지마 살인'인가 '여성혐오살인'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적 논의방식의 한계이다.이 양자택일이 위험한 이유는 이 두 축 사이의 얽히고설킨 복합적 관계성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 '여성혐오'에 대한 지극히 제한적인 몰이해를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가 마치 살인이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실행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여성혐오'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얼굴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은밀한 방식으로도 작동되고 있다. 여성을 매우 우대해주는 것 같은 소위 '신사도'의 근원적인 인식의 출발점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즉,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이해) 은밀한, 그러나 강력한 '여성혐오'이다.

여성혐오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또한 여성혐오는 노골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은밀한 방식으로 도처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여성 #강남역 #화장실 #강남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