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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불행

어떤 이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는 아닌데 왜 성별 대결로 몰고 가느냐'고 되묻는다. 또 어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봐야지 남성과 여성을 보면 안 된다'고 훈계한다. 피해자가 느꼈을, 그리고 우연히 여성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느껴야 했을 공포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는 운 좋게 남성이었고, 밤길을 걷는 데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 공포의 무게를 정확히 모른다고 그 위협과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공포가 이해되지 못할 것도 아니란 거다.

  • 백승호
  • 입력 2016.05.20 06:40
  • 수정 2017.05.21 14:12
ⓒ연합뉴스

지난 17일 새벽, 한 여성이 칼에 수차례 찔려 사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내 여성인 친구들은 얼굴에 공포를 한가득 머금고 있다. 복잡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말하고 있다. 피해자의 피살 이유가 그저 '여성'이라는 점이 알려진 뒤, 우연히 '여성'이었던 친구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나돈다. 어떤 이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는 아닌데 왜 성별 대결로 몰고 가느냐'고 되묻는다. 또 어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봐야지 남성과 여성을 보면 안 된다'고 훈계한다. 몇몇 사람일지 모를 존재들은 '남자들을 무시했으니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의 말보다 훨씬 심한, 차마 옮기기 어려운 말들도 돌아다닌다.

피해자가 느꼈을, 그리고 우연히 여성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느껴야 했을 공포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는 운 좋게 남성이었고, 밤길을 걷는데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 공포의 무게를 정확히 모른다고 그 위협과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공포가 이해되지 못할 것도 아니란 거다.

불공평한 불편함

이 사건의 가해자는 특정되었다. 살해 동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정신병이 있을 수도 있으며 분노를 (약자에게서만) 참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그의 삶이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어떤 일탈적인 개인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는 특정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이유를 아무리 찾으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피해자는 그가 우연히 그곳을 지났던 '여성'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살해다.

이 사건은 어쩌다 일어난, 그러니까 연속성이 없는 사건이 아니다. 범죄 피해자 통계자료에서 강력범죄 피해자의 성별비율은 한국만 유독 여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뉴스는 연일 보도한다. 어떤 여성은 암매장 된 상태에서 수 개월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발견된다, 어떤 여성은 염산 테러를 당한다. 어떤 여성은 감금된 채 몇 시간을 구타당했다. 그런데 가해자들이 밝힌 가해 동기는 너무 사소하다. 나를 만나주지 않아서, 나와 헤어져서, 나를 무시해서라고 설명한다. 나는 종종 내가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통계와 크게 유리되지 않은 보도들, 그리고 주변에서 이어지는 남성의 폭력에서 생존한 자의 경험담, 일상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들, 완력을 바탕으로 한 구애들. 17일 살인사건은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어났다. 으슥한 골목도 아닌 제일 번화가 중 한 곳, 강남이었다. 사소하게 덧붙일 만한 이유조차 없었다. 그냥 여성이어서 죽였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이 연속되는 상황에서 여성은 무얼 선택해야 하는가? 호신술을 배워야 할까? 범죄자 제압용 무기를 구입해야 할까? 아니면 혹자의 말처럼 쥐죽은듯, 집에서 조용히 조신하게 밥이나 하고 사는 게 정답인가?

어떤 남성은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공포의 원인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여성들의 뭇 남성에 대한 공포감의 표현은 남성 일반에 대해 살인 방조의 혐의를 덧씌우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의 공포다. 일상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공포다. 그리고 이 모든 불편부당함은 그저 우연히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복하기 힘들다.

불공평한 전달자들

수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의 사연을 덧붙인다. 남성은 서사의 중심으로, 여성은 서사의 주변부로 배치된다. 이 몹쓸 관행은 슬프게도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XX녀로 라벨링 된 피해자와 그를 죽인 가해자의 슬픈 살해동기를 설명하는 보도를 자주 보았다.

물론 가해자의 사연이, 그가 범죄를 일으킨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분노가 누적되고 있고 때문에 강력범죄가 반복되고 있단 걸 부정하겠단 게 아니다. 다만, 언론이 가해자에 대한 서사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그 분노의 피해가 유독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하며 어떤 '명백한 징후'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은 개별화되고 파편화되어 그저 어떤 충격적인 범죄 하나로만 남고 있다.

언론이 가해자의 사연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동안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었다. 이 사건이 어떤 범죄였는지는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과 국화꽃, 그리고 그곳에 모여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설명된다. 이는 우연히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살해를 당한 사건이다. 누군가가 운 나쁘게 여성이라면, 그리고 더 운 나쁘게 그곳을 지나갔다면 살해를 당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우연이라는 건, 자기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었다는 무기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헬조선, 불공평한 지옥

지난 한 해, 우리나라엔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성별에 따른 임금 차이가, 성별에 따른 승진이, 성별에 따른 해고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나 학교 등지에서 이뤄지는 성범죄에 대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불거졌다.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혐오와 관련해서 나왔던 많은 구호들은 점점 더 원초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몰카를 찍지 말라'고 말하고 있고 '강간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제발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2016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호로서는 너무 처절하다. 우리는 내전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침략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그와 비슷한 절규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힘들다. 한국은 이미 이상한 징후를 보인 지 오래되었다. 시스템이 망가졌다. 젊은이들은 취업이 되지 않아 분노와 절망, 냉소를 담으며 살아간다. 수많은 노인들은 자연사 대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단어는 이미 한국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 지위를 확보한 지 오래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이 누굴 죽이고 때릴 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극도로 날 선 분노들의 배출구를 여성으로 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지옥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만들어낼 명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1등과 2등 시민이 아니라 그냥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17일 새벽, 한 여성이 칼에 수차례 찔려 사망했다. 어떤 사람은 유사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어떤 사람은 우연한 생존자로서 이 생존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를 염려하고 있다. 이건 어떤 죽음으로 촉발되었지만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실재했던 공포였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더 불공평한 지옥이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였다.

그래서 더 슬프고 이해가 안 간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무서움에 떨고 슬퍼하는지, 왜 강남역 10번 출구에 그토록 많은 포스트잇이 붙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쳐도 그걸 조롱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은가. 그토록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적어도 입이라도 닥쳐줄 수 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위로를 해주지 못할망정, 적어도 조롱은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어젯밤도 무서움 없이 조도가 낮은 가로등 아래의 골목길을 걸어왔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엔, 친구들이 쏟아내는 말엔 여전히 공포가 묻어있다. 불행의 양조차 불공평해서, 나는 죄책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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