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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페미니스트가 바라본 명절 풍경 : “한국 사회에서 명절은 ‘여성들에게만 가혹한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받는 차별은 천천히 ‘딸들’에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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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진 ⓒ게티/뉴스1

 “상은 엄마가 다 차리는데 왜 차례엔 참여하지 못할까?”

초등학생이던 민서연(15)씨는 명절 때 할머니댁에서 차례를 지내다 궁금해졌다. “엄마는 왜 절 안 해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서연씨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자는 원래 못하게 되어 있어.”

서연씨는 명절 때 엄마와 대화를 나누거나 놀아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할머니댁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 뒤로는 종일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해가 져도 차례 준비는 계속된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도 엄마는 차례상을 차리느라 바쁘다.

엄마에게 추석이란 무엇인가. 서연씨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가 일만 하는 노예가 되는 날”이라고. <한겨레>는 지난 14~15일 서연씨를 포함해 청소년 페미니스트 세 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이 제각각 다른 명절 경험을 소개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얘기는 같았다.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명절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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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그림 ⓒ클립아트코리아/한겨레

 

명절 때만 ‘지휘관’이 되는 할머니

외할머니와 같이 사는 김진희(17)씨는 명절 대부분을 친가에서 보낸다. 거리가 멀지 않아 설·추석 연휴면 매일 아침 8시에 아버지 본가에 갔다가 밤 10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진희씨는 명절 때만 되면 할머니가 ‘지휘관’이 된다고 표현했다. 며느리인 엄마는 ‘병사’다. “이번엔 무슨 떡 맞춰라” “생선은 뭐로 사라.” 할머니의 지휘는 명절 1∼2주 전부터 시작된다. 진희씨는 “장보기부터 상차림까지 엄마가 다 해요. 평소엔 안 그렇던 아빠도 명절에 할머니댁만 가면 엄마를 안 도와주고 티브이만 봐요. 다른 남성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명절 때마다 엄마가 안쓰러워지는 건 주가진(16)씨도 마찬가지다. 명절 부엌은 ‘전쟁터’지만 남자들은 천하태평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턴 가진씨도 엄마를 돕기 시작했지만 넷이나 되는 고모들 또한 부엌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가진씨는 말했다. “어렸을 땐 고모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고모들도 명절 때 며느리 역할을 하고 난 뒤 친정에 오는 거잖아요. 한국 사회에서 명절은 ‘여성들에게만 가혹한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해요.”

 

딸도 예외는 아니다

명절은 여성 청소년이 직접 소외감을 느끼거나 차별을 경험하는 날이기도 하다. 서연씨는 초등학교 시절 남자인 또래 사촌들과 성묘를 간 적 있다. 큰아버지께선 가문과 관련된 책을 사촌들에게 나눠줬다. 호기심이 많은 서연씨는 그 책이 갖고 싶었다. “저는 왜 안 줘요?” 하고 큰아버지께 물었더니 남자들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서연씨는 “소외감을 느꼈어요. 나도 같은 성씨이고, 같은 집안사람인데 왜 여성이란 이유로 배제돼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라고 했다.

엄마가 받는 차별은 천천히 ‘딸들’에게 이어지고 체화된다. 진희씨는 이미 자신을 비롯한 여성 구성원들에게만 일이 떠넘겨진다고 느낀다. “저나 사촌언니한테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밥상을 차리거나 뒷정리를 할 때 일을 시켰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촌오빠는 지금까지도 손도 꿈쩍 안 해요. 물론 아무도 뭐라고 하지도 않고요.” 과거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남자 밥상, 여자 밥상 따로’를 직접 경험한다. 엄마가 먹을 때 같이 밥을 먹는 진희씨는 늘 남자 가족들보다 밥을 늦게 먹는다. 진희씨는 “예전엔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차별이라고 느끼지 못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면서 불편했던 추석 풍경이 가부장제의 폐해라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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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진 ⓒImage by Adam Young via Getty Images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는 추석 풍경은 단순했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즐기는 명절이다. 서연씨는 “엄마는 항상 명절이 끝나면 일주일 정도 몸살을 앓아요. 우리 엄마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나중에 결혼하면 여성에게만 부당한 명절 관습을 엄마처럼 꾹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우울해지기도 해요”라고 했다. 가진씨는 유일하게 올해 명절 풍경이 조금은 다를 것 같다고 기대했다. 할머니께서 전이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사서 차례상을 차리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가진씨는 “할머니도, 고모들도 연세가 드시니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반면 진희씨는 “올해 추석 풍경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며 대신 남자들에게 명절 당부를 남겼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냥 같이하면 안 될까요? 아빠, 큰아버지, 사촌오빠들! 양심적으로 설거지라도 합시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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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명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