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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둘이라면?" 트렌스젠더 소설가 김비의 몽상

딸이나 아들이 성소수자로 살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무엇보다 꼭 ‘사랑을 아는 사람’을 만나라고 말해줄 것이다.

  • 김비
  • 입력 2021.01.16 18:01
신랑이 세상에 온 지 막 40일 넘은 아기를 안고 있다. “아이의 존재가 나에게 선물인 시간이었다”고 적었다.
신랑이 세상에 온 지 막 40일 넘은 아기를 안고 있다. “아이의 존재가 나에게 선물인 시간이었다”고 적었다. ⓒ한겨레/박조건형 그림

둘만 사는 생활이 고독하지 않으냐고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그럴 때면 우리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워보는 건 어떠냐고 먼저 제안하곤 한다.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신랑은 평소에 고양이 영상을 찾아볼 만큼 관심이 있긴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작년 가을에는 “조만간 우리도 고양이 키울 준비를 해봅시다”라고 논의를 하긴 했지만, 신랑도 나도 지금은 다시 또 물러난 상태다.

글 쓰는 일 말고, 신랑을 지키는 일 말고, 나는 다른 일에 힘을 쏟을 수 있을까? 글 쓰는 일이란 ‘쓰는 일’이 아니라 머릿속에 글을 ‘키우는 일’인데, 나는 세가지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일까? 마당이나 숲이 근처에 있는 집이라면 너른 세상이 동물들에게 벗이 될 테니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신랑도 나도 때때로 혼자만의 굴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인데 새로운 가족을 책임지고 키우는 양육자가 될 수 있을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해답은 어렵지 않았다. 행복이란 반드시 책임의 그림자를 지고 오는 것. 현재의 나에게는 나를 지키고 신랑을 지키는 아주 작은 보살핌의 책임만을 수행할 힘뿐이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일이다. 평생 관리해야 하는 허약한 몸이란 걸 알게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되고 말았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다면

그래도 둘만이 아닌 또 다른 가족을 꿈꾸는 마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신랑의 어린 시절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는데, 이따금 사진 속 아이에게 붙들린다. 과거 어느 순간 카메라를 보던 열살 남짓한 아이의 무관심, 장난기, 혹은 무표정. 우리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가족이라면 우리 두 사람의 아이는 어떤 얼굴일까? 카메라 너머에서 나는 혹은 신랑은 어떤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까?

몇번 신랑에게 우리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둘이라면 어떤 아이로 키울 것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신랑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내가 아닌 다른 임신 가능한 여성이었더라도 합의하에 아이 없는 둘만의 부부 생활을 했을 거라며, 단호하게 그런 삶은 상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의 삶에 어떤 시간이 그를 그런 결심에 다다르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이 마흔 중반을 넘기고 있으니 그 결심이 흔들릴 법도 한데, 어떤 트라우마가 그에게 그토록 견고한 생각을 갖게 했는지 나는 섣불리 짐작해서도 안 되는 일인지 모른다. 여기 내 앞에 선 사람이 이 사람이고 이 사람을 사랑했으면 그뿐, 이 사람의 기억이나 과거까지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이 사람을 만든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기본값.

신랑의 어린 시절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는데, 이따금 사진 속 아이에게 붙들린다.
신랑의 어린 시절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는데, 이따금 사진 속 아이에게 붙들린다. ⓒ한겨레/김비 제공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아이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불현듯 그와 나를 뒤섞은 아이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진다. 아이가 어떻게 커갈지, 우리는 아이를 어떤 모습으로 키우게 될지 떠올린다. 두렵기도 하고 또 설레기도 하면서 이번 생에는 나에게 없을 그 시간을 그려보기도 한다.

딸아이라면, ‘여성’이라는 이 세상이 만든 모든 관념에 묶이지 않게 하는 것이 첫번째.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면, 네가 바라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들을 너는 마음껏 할 수 있고, 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고, 너는 모든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고 말해줄 것이다. 마음껏 소리치거나 큰 소리로 웃어도 되고, 다리를 벌리고 앉거나 고릴라 흉내를 내며 뛰어도 괜찮다고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즐거움을 원하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한 즐거움을 원한다면 그 또한 너의 선택이며, 너는 충분히 네가 원하는 방식의 즐거움을 취하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재라고 말해줄 것이다.

지인의 반려묘.
지인의 반려묘. ⓒ한겨레/ 박조건형 그림

아이가 자라 말도 안 된다고 엄마는 왜 맨날 이상한 말만 하냐고 투정을 부리는 나이가 되면, 그때는 나도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져버린 때. 억지 쓰지 않고, 집착하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 아이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제 너는 엄마나 아빠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걸 배워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싸워야 하는 일은 더 많아지고 견뎌야 하는 일도 더 많아질 테니, 그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온전한 너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말해줄 것이다. 매번 무너지는 사람이기보다 매번 다시 일어서는 사람으로 강해지기를 바란다고 부탁할 것이다.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더라도, 듣지 않는 말이라도 끝내 다정하게 말해주고서 내 손으로 아이의 방문을 닫고 돌아서야 할 것이다. 아이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아들이라면,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게 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일 것이다. 문밖의 세계는 끊임없이 너에게 승부를 강요하고 이길 것을 주문하지만, 승리한 자도 승리하지 못한 자도 결국 언젠가 자신들의 싸움을 이겨낼 사람들이니, 패배와 사람을 동일시하지 않고 사람 그대로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세를 먼저 말해줄 것이다.

어느 순간 몸의 욕망을 다스려야 하는 시기가 올 텐데, 몸은 도구일 뿐 얼마든지 네가 네 몸의 주인이 되어 통제할 수 있으며, 오히려 통제를 통해 더 큰 힘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줄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당연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네 말끝에 발걸음에 누군가 다치지 않는지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 딸이나 아들이 성소수자로 살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무엇보다 꼭 ‘사랑을 아는 사람’을 만나라고 말해줄 것이다. 성소수자로서 아직은 셋이나 넷, 다섯이 되는 가족을 꿈꾸기 쉽지 않은 만큼 그래서 더욱 서로에 대한 사랑이 굳건해야 하고, 그 사랑이 자라고, 늙어가고, 그래도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정말 좋겠구나, 축하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을 것이다.

성전환자라면 이미 어린 시절에 남다름을 알아챘겠지만,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던 아들이나 딸이 다른 성별로 사는 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고 고백한다면, 충분히 냉정한 판단이었느냐고 딱 한번 물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방향을 정하는 일, 그 방향에 책임을 지는 일. 어떤 삶도 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네가 원하는 어떤 자유는 끝까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고, 노파심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다시 한번 묻고 말 것이다.

울지 않고서 같이 멋지게 이겨내보자고 말하긴 하겠지만, 결국 홀로 남게 되면 아이가 맞닥뜨려야 할 고통이 떠올라 훌쩍거리고 말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찾아가겠다는데,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를 가로막는지. 절대 아이 앞에서 울지 말아야지, 그러고도 여러 날 눈가를 훔칠 것이다.

 

지인과 그의 딸.
지인과 그의 딸. ⓒ한겨레/박조건형 그림

지금 이 순간, 이미 두셋의 아이를 키워낸 부모들의 표정이 어떨지 나는 안다. 애도 키워보지 않은 양반이 이런 다짐이나 바람이 무슨 소용이냐, 새벽마다 우는 아이를 몇달씩 끌어안고 사는 고통을 당신이 아느냐고 코웃음을 치는 분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운 사람들 중에 이렇게 꿈을 꾸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현실은 아이와 뒤엉켜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엉망진창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간이었더라도, 모든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가장 큰 꿈을 꾸었던 사람이 아닐까? 평생 제일 큰 꿈을 꾸었던 자신을 그렇게 간단히 지워버려도 되는 일일까?

경험을 가질 수 없으니 아이를 키우는 일에 나는 무지하고 더듬거리는 몽상가일 수밖에 없지만, 허구 속에서나마 아이의 성장을 그리는 이야기를 꿈꾼다. 아직 내가 쓸 이야기는 어둡고 아픈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언젠가 아이와 같이 자라고 나도 아이와 같이 자라는 시간을 소설 속에 옮겨올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그즈음엔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마구 뛰어다니는 동네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아무나 붙들고 마음 편히 읽어줄 수 있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그때에는 쓸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꿈꾼다.

우리 사회는 아직 성소수자 부부의 양육을 상상할 수 없겠지만, 누군가를 보살피고 키우며 함께 성장하고픈 욕망이 성별이나 육체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주변 성소수자 부부들의 생명에 대한 애틋함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세심하게 보살피고 소통하려는 노력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부럽기만 하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육아를 하기에는 부족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그럼에도 모든 아이에게 차고 넘치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안다. 부모뿐만 아니라 이 사회로부터, 세상의 모든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에게는 무한정의 사랑이 필요하단 걸 알고 있다. 돌아보면 나 자신 역시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던 아이였다. 부모로부터의 사랑이 참으로 간절했는데, 어디에서도 사랑을 찾기 힘들었던 고립된 삼남매 중 하나였다. 그 시절엔 참 많이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 아이들이 모두 어른이 된 지금 시대라면 달라져야 하겠지만, 여전히 아이는 부모의 부속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의 의지대로 자식을 끌고 가야 한다는 믿음은 공고하고, 부모의 절망은 무조건 자식들의 절망이 되고, 부모의 생이 망가지면 자식들에게 그 몰락이 대물림되는 현실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자녀들의 의견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행되는 끔찍한 비극은 매번 안타까움으로만 환원되며 끝내 또다시 익숙해진다.

돈 말고, 우리에게 가르칠 사랑은 남아 있을까? 내 새끼만 귀중한 줄 아는 비뚤어진 애정 말고, 문밖의 모든 생명이 귀하다는 믿음을 가르칠 사랑이 있는 걸까? 출산율 말고,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기본값의 사랑을 우리 사회는 제대로 측정해본 적이나 있을까?

모자라고 능력도 없는 몽상가에 불과하지만, 성소수자 시민으로서 다시 한번 이 사회에 부탁한다. 모두들 많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요즘만큼 힘든 시기는 다시 찾을 수 없을 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지켜주시길 바란다. 뼛속까지 새겨졌을 우리의 절망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끝까지 애써주시고, 끌어안고 같이 죽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주시고, 정부 관계자분들은 아동학대로 분리조치 당한 아이들이 머물 위탁시설부터 제일 먼저 곳곳에 충분히 마련해주시고, 제발 제대로 육아할 수 있는 환경부터 서둘러 만들어주시고….

꿈밖에 꾸지 못하는 허약한 어른인 나는 이번에도 다급한 바람만 되뇐다. 겨울이라도 따듯해야 할 텐데, 올해 유난히 지독한 혹한 탓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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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가족 #LGB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