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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은 구애 아닌 범죄” : 마침내 '스토킹처벌법'이 통과됐고, 9월 말부터 시행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토킹으로)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뉴스1

 

“I’ll kill you, my suicide or your genocide(죽이겠다. 나의 자살 또는 너의 학살)”

2017년 12월, ㄱ씨는 집 출입문에 빨간색 사인펜으로 영어 문장이 쓰여있는 걸 발견했다. 집 앞에는 스테이플러 심이 여러 개 박힌 ㄱ씨의 ‘채용 건강 신체검사서’와 협박 편지도 놓여있었다. 5년 전 자신의 고등학생 제자였던 강아무개(25)씨가 저지른 일이었다. ㄱ씨는 이런 식의 스토킹과 협박을 무려 7년간 겪어야 했다.

강씨는 이미 2013년 ㄱ씨를 협박해 소년보호처분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16차례에 걸쳐 협박 문자를 보내는 등 스토킹을 멈추지 않았다. 강씨는 상습협박 혐의로 기소됐지만, 수원지법은 ‘반성과 아스퍼거 증후군’을 이유로 징역 1년2개월의 가벼운 형을 선고한다. 솜방망이 처벌은 또다른 범죄로 이어졌다. 2019년 3월 출소한 강씨는 한 구청 가정복지과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며 빼돌린 ㄱ씨의 개인정보를 협박 문자에 사용했고, ㄱ씨의 아이를 해치기 위해 ‘박사’ 조주빈(25)씨에게 400만원의 현금까지 건넨다. 강씨의 스토킹이 ㄱ씨 아이의 살해를 모의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스토킹’은 최대 10만원의 벌금·구류 또는 5만원 미만의 과태료 처분에 그치는 ‘경범죄’였다. 쓰레기 무단투기·광고물 무단부착과 비슷한 정도의 범죄로 여겨진 셈이다.

24일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재석의원 238명 중 찬성 235명·기권 3명)했다. 지난 1999년 15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처음 발의된 뒤 22년만이다. 피해자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벌금 8만원짜리 경범죄나 구류로 가볍게 넘어가던 스토킹을 무겁게 처벌할 길이 열렸다. 법이 시행되면 강씨와 같은 사례도 상습협박 등 다른 혐의를 우회할 필요 없이 스토킹 그 자체로 최대 5년의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

스토킹 처벌법 입법 22년사
스토킹 처벌법 입법 22년사 ⓒ한겨레

 

‘구애 아닌 범죄’ 명문화…“스토킹=범죄 인식 형성될 것”

이번에 통과된 스토킹처벌법은 ‘순애보’ ‘구애’ ‘괴롭힘’ 정도로 취급됐던 스토킹 행위가 ‘범죄’가 될 수 있다고 명문화했다.

스토킹처벌법은 ‘스토킹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접근하거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주거·직장 등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 △우편·전화·팩스 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물건·글·말 등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스토킹 범죄’는 이같은 행위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정했다.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흉기 등을 이용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법안 통과로 ‘스토킹이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교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휴대전화로 불안감을 유발하는 이상한 문자를 보내는 걸 ‘하지 말아야 할 행위’라고 정의를 내려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다.


스토킹법 통과로 경찰이 접근금지 등 즉각적 개입 가능해져

스토킹 피해자 입장에서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경찰이 신고를 받은 직후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처벌법 4조(긴급응급조치)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직권으로 △스토킹 행위 상대방에 대한 100m 이내 접근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 등의 조처를 할 수 있게 규정했다. 스토킹 범죄가 재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경찰의 신청과 검찰의 청구로 스토킹 행위자를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최대 1개월까지 유치(잠정조치)할 수도 있다.

지난해 6월 21대 국회에서 스토킹처벌법을 가장 먼저 발의한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토킹을 신고했을 때 기존에는 경찰이 피해자를 즉각적으로 보호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면, 법 통과 이후에는 긴급조치와 잠정조치를 통해 신속한 개입이 가능해졌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피해자 의사에 따른 처벌, ‘과태료 처분’에 그치는 처벌은 한계로 꼽혀 

스토킹 범죄 건수 추이
스토킹 범죄 건수 추이 ⓒ한겨레

 

이번 법안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여성계에서는 특히 법안 속 ‘반의사불벌’ 조항에 아쉬움을 표한다. 스토킹처벌법은 흉기를 사용하지 않은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밝힌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통계적으로 봤을 때 스토킹은 가족이나 애인 등 ‘주변인’에 의해, 피해자와 위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을 때, 이것이 피해자의 본심인지, 아니면 협박에 의한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스토킹 행위자가 접근금지 등 긴급응급조치를 위반했을 때 처벌이 ‘과태료’ 처분에 그치는 것도 취약점으로 지적된다. 처벌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긴급응급조치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송란희 상임대표는 “가정폭력이 그러하듯 스토킹 범죄는 초기 개입이 중요한데, 긴급응급조치를 위반해도 과태료 처분에 그친다면 실질적인 예방 효과를 담보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보호조처를 요구할 수 있는 피해자 보호명령, 피해자의 일상회복을 위한 지원제도 등이 빠진 것도 이번 법안의 한계로 꼽힌다.


“많은 이들 고통받고 너무 늦었지만 비로소 첫 발 떼”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연락할 수도 있지, 왜 그런 것까지 처벌하려 드냐’는 한국 사회의 ‘가벼운 인식’은 오랫동안 강고했다. 15대 국회에서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14차례나 발의됐던 법안들은 단 한 건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3~19년 3094건의 스토킹 범죄(경찰청 통계)가 발생했고 목숨을 잃은 이들도 여럿이다. 2019년 ‘진주 방화·살인 사건’ 피해자인 고등학생은 스토킹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다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상해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다 결국 살해되기도 했다. 법안 통과가 미뤄지는 22년 간 스토킹을 ‘전조현상’으로 하는 여러 강력범죄에 노출됐을 피해자의 숫자를 고려하면,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반응은 당연하다.

여러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처음 통과된 스토킹처벌법은 시작점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정춘숙 의원은 “스토킹은 단순히 구애의 문제, 사람을 쫓아다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죽음에 이르러야 끝나곤 했던 문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비로소 국회가 응답한 것이고, 첫발을 뗀 것”라고 말했다. 스토킹처벌법은 6개월 뒤인 9월 말부터 시행된다.

 

한겨레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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