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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사랑한다며 쫓아다니던 남자가 동생을 살해했다

CCTV에 포착된 동생의 마지막 얼굴은 웃고 있었다. 동생은 무방비였다.

ⓒson of you

스토킹’ 하면 낯선 사람이 따라오는 모습이 연상되나요? 스토킹 가해자의 대부분은 (전) 남자친구, (전) 남편입니다.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스토킹이 발생하는 셈입니다. 한때 친밀한 관계였던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때론 다정한 얼굴을 보이기도 하죠. 가해자는 위협만 하는 게 아니라 애원하고 호소합니다. 피해자의 동정심, 죄책감을 노린 계산적인 행동입니다. 제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싶지만 피해자를 통제하고자 하는 가해자의 욕구는 결코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와 만난 스토킹 살인 유가족과 지인들은 한목소리로 ‘그때는 몰랐다’고 자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낸 오답은 사실 우리 모두의 무지와 편견일 겁니다. ‘또 다른 헛된 죽음을 막고 싶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스토킹 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기획 기사는 스토킹이 어떻게 잔혹한 살해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세 건의 범죄 스토리를 통해 유가족과 지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수년간 일방적 구애를 하던 남성에게 동생을 잃은 언니의 이야기입니다. 언니는 왜 “사랑한다는데 설마 죽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을까요.

ⓒson of you

[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① 동생 잃은 언니의 깨달음

‘덜컹.’

부산 수영구의 한 원룸, 윤민정(가명·당시 24)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방문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허름한 방은 이미 형사들이 헤집어 책이며 인형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여기서 내 동생이 죽었구나.’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다시 윤민정의 몸을 날카롭게 스쳤다.

2017년 11월19일, 윤민정의 동생 민희(가명·당시 22)가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딸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20일 새벽 4시께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 추적 등을 통해 20일 오후 민희를 찾았다. 최현승(가명·37)의 원룸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였다. 최현승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이 더러운 공간에 동생의 물건을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아.’ 윤민정이 동생 장례를 마치고 살해 현장이자 가해자의 방인 그곳으로 간 이유다.

동생의 가방을 찾았다. <좋은 교사 되기>라는 제목의 책이 들어 있었다. 동생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방에는 최현승이 보던 책도 있었다. 펼쳐보니 뜻밖에도 동생에게 쓴 편지가 이곳저곳 쓰여 있었다. “민희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사랑하는 민희를 위해 살을 빼야겠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사랑, 한다고? 속에서 역겨운 기운이 올라왔다.

해일처럼 덮친 동생의 죽음

“싹싹하고 듬직했어요. 착하고 다정해서 남녀를 떠나 인기가 많았죠.” 윤민정이 기억하는 동생 민희다. 대학 입학 뒤 혼자 서울로 올라온 탓에 부산에서 부모님과 사는 동생과는 몇년 동안 떨어져 지냈다. 하지만 여느 자매처럼 전화로 메신저로 수다는 끊어질 틈이 없었다. 서로의 연애담도 단골 소재였다. ‘언니’ 대신 애칭을 붙여 부를 정도로 동생은 언니를 따랐다.

윤민정에게 동생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동생은 4수를 하고 2017년 부산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재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동생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커서인지 연애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휴대전화도 정지시켰다. 화장도 안 했다. 대학에 가서야 “입술에 틴트도 바르고 보기 좋다”며 엄마가 좋아할 정도였다. 열심히 준비하더니 미국으로 교환학생도 가게 됐다. 윤민정은 그런 동생이 자랑스러워 낯간지럽지만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녔다.

동생의 죽음은 해일처럼 순식간에 덮쳤다. 11월20일, 윤민정의 졸업전시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희가 부모님 모시고 전시회 보러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지?’ 반갑게 받은 전화는 윤민정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생이 실종됐다고 했다. 초조하게 몇시간이 흐르고 들려온 소식은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착하다”던 그 남자가…

“불쌍해. 착하고.” 생전 민희가 언니 윤민정에게 최현승에 대해 한 말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동생이 재수생이던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민정은 “최현승이 길거리에서 동생을 보고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몇번 만나긴 했지만 제대로 사귄 기간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끝인 줄 알았는데 시작이었다. 윤민정은 “동생이 계속 거절하는데도 최현승은 일방적으로 집에 편지를 보내왔어요. 동생은 거의 답장을 보내지 않았어요”라고 기억했다. 윤민정도 최현승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열심히 공부해”, “네가 잘되길 빌게”와 같은 내용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구석은 없었다.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다 떨어지겠지.’

2017년 봄, 대학에 들어간 동생은 첫 남자친구를 만났다. 최현승과는 달리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소개할 정도로 진지한 만남이었다. 잘 사귀나 싶더니 여름께 갑자기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누군가 익명으로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네 남친은 전 여친을 낙태시키고 성매매도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윤민정은 “그 과정에 최현승이 개입했어요. 동생한테 ‘그런 쓰레기랑 만나면 안 된다’며 일종의 ‘상담’을 해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메시지의 발신자가 누군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난 조금 있으면 죽어, 몇달만 참아줘”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최현승의 구애는 계속됐다. 울면서 “옆에만 있게 해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보내줄게”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생이 “나 말고 더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 여자 사귈 수 있는데 내가 뭐가 좋다고”라며 되레 최현승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아파.” 6월, 동생이 윤민정에게 메신저로 이야기했다. 최현승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거다.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두달 남짓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고 곧 요양원에 들어간다고 했다. 최현승이 “난 어차피 조금 있으면 죽을 사람이니 몇 달만 네가 참아줘”라며 ‘한번만 더 만나달라’고 애원한다고 했다. 공강 시간에 학교 근처로 찾아오거나 학원 가는 길에 ‘같이 걷게만 해달라’고 했다고도 했다.

ⓒson of you

CCTV에 잡힌 동생의 웃는 얼굴

동생은 곧 죽는다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생은 “(최현승이) 불쌍하다”며 엄마 앞에서 운 적도 있었다. 엄마는 “널 좋아해준 사람이니까 불쌍하니 밥 사 먹이라”며 돈까지 쥐여줬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생은 윤민정에게 “머리가 아프고 복잡해. 감정 소모도 심하고 스트레스 받아”라고 토로했다. 교환학생 출국을 앞두고 최현승 때문에 시간을 뺏기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죽을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기적이야”라며 또 자신을 탓했다.

10월, 윤민정은 서울에서 동생을 만났다. 혹시나 싶어 호되게 몰아붙였다. “민희야, 아직도 최현승 만나주는 거 아니지?” “아니야, 이제 안 만나. 연락 안 한 지 몇달 됐어.” 그날은 윤민정이 동생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11월19일, 동생은 도대체 왜 연락을 끊었다던 최현승을 만나러 갔을까. 윤민정은 “동생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분명히 최현승은 또 울면서 한번만 더 만나달라고 했겠죠. 몇주 뒤면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려고 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최씨의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의 얼굴이 잡혔다. 웃고 있었다. 동생은 무방비였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거짓말

경찰은 윤민정에게 죽은 최현승이 서른일곱살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최현승을 ‘동갑’으로 알고 있었다. 집은 잘살지만 부모가 이혼해서 용돈을 받아 쓴다는 말도, 누나가 있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충격적인 거짓은 또 있었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동생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에 발이 묶여 죄책감까지 느끼며 마지막까지 최현승을 내치지 못했다. 윤민정에게 이 거짓말은 너무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최현승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최현승이 ‘약자 코스프레’를 하며 피해자의 동정심을 이용했다”며 “최현승은 자존감이 바닥이면서 관계에 대한 병적 집착이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 죽음만이 피해자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취해 본인도 같이 죽는 드라마틱한 결말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son of you

“칼 맞을 수도 있어” 말로만 그랬지 설마…

윤민정은 지난해 6월 동생 민희와의 카카오톡 대화 일부를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대화 내용은 가해자 최현승의 자살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증거다.

ⓒKakaotalk

윤민정의 경고는 말뿐이었다. 그는 “그냥 말로만 ‘그런 애들이 칼 꽂는다’고 이야길 한 거죠. 내 동생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인데 설마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최현승이 평소 협박을 하거나 때린 적이 없다는 점도 윤민정과 동생 민희가 경계심을 낮춘 중요한 이유가 됐다. 경찰 신고 역시 같은 이유로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다면….” 윤민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은 “최현승처럼 신체적 위협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 반해 계속 쫓아다니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행위 자체가 스토킹이자 폭력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최현승의 행동을 ‘꾸준한 구애’ 정도로 보고 그 이상의 위험 신호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윤민정과 동생 민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 2월 정부는 스토킹처벌법(가칭)을 제정해 현행 범칙금 수준에서 형사처벌로 스토킹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조 팀장은 “법이 제정된다 해도 스토킹 인정 여부, 피해자 공포에 대한 측정과 입증은 결국 다시 사회적 인식 수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윤민정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한다는데 죽일 리 없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저는 물론 누구도 동생을 구하지 못할 거예요.”

다시 생각하는 사랑의 이름

윤민정이 동생의 주검을 보기 전, 동생의 사망 기사가 먼저 나왔다. ‘정말 내 동생 이야기일까.’ 윤민정은 기사를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그런데 동생이 끝이 아니었다.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매일 그런 기사들이 보였어요. 다음날이면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그 다음날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죽이더라고요.”

그들도 최현승과 똑같았다. 최현승이 마지막까지 동생을 “사랑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들도 경찰 수사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나는 내가 죽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Sangahkwak/huffpostkorea

윤민정은 동생의 죽음으로 미뤄진 졸업 전시회를 다시 꾸몄다. 제목은 ‘사랑의 이름’. 기사 검색창에 ‘남자친구 살해’라고 쓰자 최근 1~2년 사이에만 수십건의 기사가 나왔다. 윤민정은 편지지를 펼쳐 살인 사건들을 직접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죽이고 애완견까지 세탁기에 넣어 죽인 남성에게 법원이 중형을 선고했다.’ 하트 표가 그려진 편지 겉봉투에는 이렇게 썼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아 참! 그게 바로 너야!’

ⓒSangahkwak/huffpostkorea

전시회가 열린 12월27일은 동생이 죽은 지 한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동생이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출국하려던 날이기도 했다. 윤민정은 전시회에 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Sangahkwak/huffpostkorea

스토킹 피해자더러 ‘꽃뱀’이라니

‘원룸서 15살 나이차 남녀 숨진 채 발견,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헤어지자니까 죽인 거 아냐? 동반자살인가? 커지는 의심’

윤민정의 동생 민희의 죽음을 다룬 기사들의 제목이다.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은 그 자체로 윤민정과 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댓글도 상처가 됐다. 윤민정은 “동생을 두고 ‘꽃뱀’이라고 몰아가거나 ‘남자가 다 해주고 나니 튀려고 해서 그렇지’ 같은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악플로 치부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너무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son of you

그 뒤를 이은 댓글은 충고를 가장한 꾸중이었다. ‘왜 그런 쓰레기를 만났어, 여자가 보는 눈이 없네’ 같은 이야기였다. 윤민정은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해요. 남자가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면 헤어지라고. 그런데 최현승을 봐서 알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요. 그리고 말이죠, 왜 여자가 도망가고 일일이 조심해야 하는 건가요?”

살렸다 죽이고, 살렸다 죽이고 싶지만…

윤민정은 최현승이 자살한 게 “차라리 낫다”고 했다. 재판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은 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살렸다 죽이고, 또 살렸다 죽이고 싶죠. 그런데 재판받고 다시 살아서 사회에 나올 걸 생각하면 최현승이 자살한 게 나은 것 같아요. 형량이 너무 적더라고요. 전 여자친구 죽여도 10년, 어떤 사람은 아예 집행유예로 나오던걸요. 또 최현승이 우리 집을 알았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son of you

이제 동생도, 최현승도 없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남았다. 아직 해지하지 않은 동생 휴대전화에 기대를 걸고 복구업체에 여러번 의뢰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기기 특성 탓이라고 했다.

가끔 무신경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아버지가 많이 캐고 다니셨어요. 민희 친구들한테 일일이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하셨죠. 그런데 친구들도 딱 저만큼 알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러고 계세요.”

어쩌면 아버지는 진실을 좇고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아버지는 지금 그보다 훨씬 소중한, 딸의 흔적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하루 두번, 윤민정에게 전화를 건다. 남은 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 이 기사는 윤민정(가명)씨와의 인터뷰, 윤씨가 제공한 동생과의 카카오톡 메시지 대화 내역, 그리고 지난해 12월27일 열린 ‘사랑의 이름’ 전시회 소개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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