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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휘발유] '노는 언니', 맘 먹고 놀아본 건 처음인 여성 운동선수들의 연대와 공감

박세리, 이재영, 이다영, 남현희, 곽민정, 정유인이 출연한다.

  • 라효진
  • 입력 2020.08.06 14:36
  • 수정 2020.10.16 10:36
E채널 '노는 언니'
E채널 '노는 언니' ⓒE채널

이만기와 강호동 이래로 운동선수들의 방송계 진출이 본격화된 것이 어언 30년이다. 최근에는 은퇴한 각 분야 운동선수들이 모여 축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등장할 정도니, 한때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전문 방송인 기근 현상도 사그라드는 모양새다.

문제는 방송인으로 전업한 운동선수들의 성비가 극악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몇 년 새 여성 코미디언 송은이와 이영자를 필두로 방송가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시작되며 이를 기반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그럭저럭 정착하고 있지만, ‘여성 운동선수 출신 방송인‘의 숫자는 0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배구선수 김연경과 골프선수 박세리가 일회성으로 MBC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에 출연해 화제를 불렀으나 이들이 한 프로그램을 온전히 이끄는 ‘전문 방송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4일 첫 방송된 E채널 ‘노는 언니’의 등장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출연진은 골프선수 박세리, 펜싱선수 남현희, 배구선수이자 쌍둥이 자매인 이재영-이다영, 피겨선수 곽민정, 수영선수 정유인으로, 전원이 은퇴했거나 아직 현역인 여성 운동선수들이다. 이들이 운동선수로 산 ‘제1의 삶‘과 잠시 작별하고 해 본 적 없는 일들을 벌이며 ‘제2의 삶’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이 새롭다.

‘노는 언니’가 새롭다는 건 매우 급진적인 시도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박세리를 제외하곤 출연진 가운데 방송 경험을 보유한 이가 없다. 그런 탓인지 제작진은 익숙하면서도 안전한 ‘관찰 예능’ 포맷을 썼다.

E채널 '노는 언니'
E채널 '노는 언니' ⓒE채널

여섯 명의 여성 운동선수들은 ‘노는 언니’ 1회에서 여행을 떠난다. 여기까지는 너무나도많이 봐서 전개를 외울 정도의 설정인 게 맞다. 관전포인트는 이들이 소풍, 수학여행, MT, 하다못해 친구들과 ‘각 잡고’ 놀러가 본 적이 없다는 점에 있다.

첫 만남은 시청자가 다 어색할 정도였지만 대장부 자질의 박세리가 이내 동생들을 이끈다. 반복되는 훈련과 기록, 자신의 신체와 싸워왔던 경험들이 아침부터 찾은 갈빗집에서 흘러나온다. 이들은 피겨선수의 ‘선수 생명‘이 대개 20대 초반에 끝난다는 곽민정의 말에 놀라고, 여성 수영선수들은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로 팀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정유인의 말에 분노한다. 선수로서, 여자로서 무언가를 뛰어넘으려 노력해 온 자신을 이야기하는 여섯 사람의 연대와 공감은 ‘노는 언니’의 미덕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활동할 수 있는 분야는 골프와 펜싱이지만, 이마저 40대를 넘으면 기량이 떨어지며 은퇴를 해야 한다. 그래서 여섯 사람 사이의 화두는 ‘제2의 삶’이다. 그 화두의 연장선상에 ‘노는 언니‘가 있다. 놀아 본 적 없는 여성 운동선수들의 놀아보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기획의도 뒤에는 ‘어떤 평범한 여성들의 삶’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진짜 의미가 녹아 있다.

그 결과 ‘노는 언니‘는 화제성도 확보했다. 5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1회 방송은 전국 기준 0.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E채널 오리지널 프로그램으로썬 나쁘지 않은 수치다. 방송 다음 날까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차트에 ‘노는 언니’가 오르내리는 등 시청자들의 관심도 입증됐다.

다만 한계도 포착된다. 프로그램 내외를 막론하고 ”지금이 즐거워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박세리에게 굳이 남자를 붙이려 드는 태도다. 방송 전날인 3일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노는 언니’ 제작발표회에서 진행을 맡은 홍현희는 ”박세리씨 시집가는 걸 보고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했으며, 방현영CP도 박세리의 소개팅 특집에 관심을 보였다.

1회에서도 후배들은 박세리에게 ‘왜’ 연애를 안하냐고 묻는다. 박세리는 어느 때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고 답하지만, 굳이 연애를 주선하는 시대착오적인 기획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모처럼 의미 있는 도전이 ‘그저 그랬다’는 평가를 면하려면 제작진은 시대의 흐름과 일회성 재미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노는 언니’가 운동선수 출신 여성 전문 방송인들의 도약으로 더 다양해질 방송가를 만들 초석이 될지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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