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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이 준 선물

[어쩌다 남극⑤]

ⓒhuffpost

남극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은 긴박하게 흘러갔습니다. 한국이 봄을 준비할 동안 남극은 여름의 끝이 왔음을 알리듯 점점 더 추워지고 파도는 거세졌죠. 선상 생활 4주 차에 접어든 우리는 조금 더 땅을 그리워했고 몸은 지쳤지만 남극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이 아까워 바삐 움직였습니다.

남극이 준 선물

남극으로 떠나기 전, 남극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눈여겨보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꽃입니다. 온통 눈으로 덮힌 남극에는 단 두 종류의 꽃만 핀다고 합니다. 남극개미자리와 남극좀새풀. 열대지방에 피는 화려하고 큰 꽃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생김새의 꽃이지만 차디찬 얼음 땅에 뿌릴 내리고 싹을 틔웠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특별한 존재이죠. 남극을 떠나기 전, 동료들에게 남극에서 이 꽃을 발견한다면 꼭 사진으로 남겨서 전하리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남극에서 꽃을 보게 될 줄이야. 남극에서의 마지막 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섬에 상륙을 해서 걸어가던 중 선인장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외관을 가진 식물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남극개미자리, 그것도 아직 지다 만 꽃이 남아 있는 상태의 남극개미자리였습니다. 마치 추위를 피하는 법을 아는 듯 커다란 화산암의 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자리 잡고 있었죠. 남극 한복판에서 꽃을 발견하자 캠페이너도, 포토그래퍼도 모두 모여 남극에 핀 꽃 사진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갔습니다.

남극개미자리. 연두색 잎 사이로 보이는 흰색 부분이 꽃이다
남극개미자리. 연두색 잎 사이로 보이는 흰색 부분이 꽃이다 ⓒ그린피스

이 조그마한 꽃 하나에 애들처럼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극이 우리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선물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이 한 줌만 한 꽃조차도 특별하게 만드는 힘과 신비는 오직 남극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요.

그렇게 남극이 준 선물과 함께 마지막 주는 쏜살같이 지나갔고, 아틱선라이즈 호는 드디어 푼타아레나스로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습니다. 드레이크 해협에서의 거친 파도에 대비를 선박 안의 모든 물건은 쏟아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만약의 비상 상황을 대비한 훈련도 진행했죠. 하지만 아직 남극과 작별을 고할 준비가 안 된 우린 흐린 날씨도 하루에도 몇 번씩 갑판으로 나가 남극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한 달간의 남극 탐험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해질 무렵 남극
해질 무렵 남극 ⓒ그린피스

일상으로의 복귀 그리고…

남극에서 돌아오는 여정은 처음 떠날 때 만큼이나 지옥 같은 멀미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드레이크 해협을 벗어날 즈음에는 바지가 헐렁해질 정도로 몸무게가 빠진 채였죠. 하지만 한 달 만에 다시 마주한 푼타아레나스는 그간 남극에서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거리를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문을 활짝 연 상점들, 차도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늘어선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남극에서의 고요하리만치 차분한 풍경과 대조되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남극에 다녀오면 많은 것들이 변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달랐기 때문일까요?

푼타아레나스 시내
푼타아레나스 시내 ⓒ그린피스

돌아온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보다 더 정신 없었습니다. 2G 속도로 일을 진행하던 지난 한 달은 새까맣게 잊은 채 LTE 속도에도 답답해했고, 모든 일과를 자연의 흐름에 맞춰야 했던 배에서의 생활과 달리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언제 어디서든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게 당연해졌죠. 그렇게 남극에서의 일은 마치 꿈처럼 희미해져 갔습니다. 서울에서의 일상은 남극을 되돌아볼 틈을 주지 않았죠.

그러다 어느 날 TV를 보다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출연자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서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도 계속 일상에서 남극에서 보낸 시간과 관련된 무언가를 마주칠 때면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남극을 떠올렸습니다. 거대한 빙하들이 줄지어 선 모습과 수백 마리의 펭귄 무리, 그리고 유유히 춤을 추던 고래를 그렸죠.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 치여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하루 중에 나를 제외한 다른 대상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잘 주어지지 않죠.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남극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남극에 여전히 해가 뜨고 지고 동물들은 생존을 다투는 치열한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외면하려 해도 남극은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변함없죠.

빙하 위 아델리펭귄 무리
빙하 위 아델리펭귄 무리 ⓒ그린피스

한국의 결정이 남극에 미치는 영향

이전 ‘어쩌다 남극’ 편에서 언급했듯이 남극의 생태계는 ‘크릴’이라는 조그마한 갑각류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거미줄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크릴 없이는 고래도, 펭귄도, 바닷새도 살아남기 힘들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남극해에서 엄청난 양의 크릴을 잡아들입니다. 낚시 미끼로, 오메가3 원료로, 반려동물 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이죠. 크릴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높아지고, 크릴 어업선은 조업 범위를 확장하며 남극 생태계를 위협합니다.

이제는 정말 남극을 외면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다른 생명의 생존과 직결된 무언가를 우리 인간의 취미 활동을 위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영양분을 위해 파괴하는 일에 대해서요.

한국의 크릴 산업 규모는 전 세계 3위입니다. 그린피스의 환경감시선 ‘아틱선라이즈’ 호는 3월 남극 탐험에서 여러 국가의 거대한 크릴 어업 선박 중 한국 선박인 ‘세종’을 마주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는 우크라이나 크릴 선박을 만나 현재 보호구역으로 논의 중인 구역에서 만큼은 크릴 조업을 중단해달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평화적 시위를 펼쳤죠.

다가오는 10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25개국이 모여 크릴 조업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남극 웨델해에 해양보호구역을 지정하는 안에 대해 투표합니다. 보호구역이 지정된다면, 그 구역만큼은 남극 생물들이 마음껏 먹이를 먹고 뛰놀 수 있는 안식처가 되줄 것입니다. 하지만 25개국 중 어느 한 국가라도 반대표를 던진다면 해양보호구역 지정안은 무산됩니다.

남극에서 마주친 한국 크릴 조업선 '세종'
남극에서 마주친 한국 크릴 조업선 '세종' ⓒ그린피스

남극에서 가족이 생기다

아틱선라이즈 호에는 총 35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세로 50m, 세로 12m의 이 자그만 공간은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었죠. 그곳에서 우린 한국, 인도, 불가리아, 그리스, 칠레, 영국, 프랑스, 중국, 미국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동고동락했습니다. 탐험이 끝이 나고 헤어질 때가 되자 누군가는 한 명 한 명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노트에 직접 연필로 적어 갔고, 누군가는 몇 번씩 아쉬움의 포옹을 했고, 누군가는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했죠. 남극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서로를 보듬으며 파도와 추위를 이겨 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25개의 개별 국가들이 그들의 이익만을 내세우지 않고 더 크고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한마음을 모으는 것뿐입니다. 남극 해양보호구역의 지정은 전 세계 시민 그리고 정부가 한 발자국 더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기회이자 기후변화와 오염, 남획과 같은 전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세계가 동일 선상에 서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남극을 알기 전 제게 남극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펭귄의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우주 만큼이나 멀고 알 수 없는 공간이었죠. 하지만 이제 남극은 제게 부서지는 얼음 소리와 새하얀 눈을 맞던 새끼 펭귄, 잔잔한 수면을 뚫고 나오던 검은 고래의 등, 짠 바람과 비, 해 질 녘의 오색빛 하늘 그리고 전 세계 각지의 집으로 돌아간 친구들의 땀과 웃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동안 어쩌다 남극 시리즈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남극이 이전보다 아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남는 것입니다.

아틱선라이즈 호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아틱선라이즈 호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린피스

남극은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이곳을 오염시키거나 위협하지 않도록 우리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가장 필요한 곳이기도 하죠.

그린피스와 함께 지구상 마지막 미지의 땅 남극을 보호하는 데 여러분의 힘을 보태주세요. 그러면 남극은 우리에게 얼음을 뚫고 피는 꽃 이상의 신비로운 자연과 지구에 대한 자부심을 선물할 것입니다.

남극 빙하와 그 앞에 있는 아틱선라이즈 호
남극 빙하와 그 앞에 있는 아틱선라이즈 호 ⓒ그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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