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모든 소셜미디어 계정을 제거한 후의 내 삶은 이렇게 바뀌었다

한 밀레니얼의 고백

  • 김태성
  • 입력 2018.07.18 14:16
  • 수정 2018.07.18 14:55
ⓒamesy via Getty Images

7년 전 엄마의 허락을 받고 소셜미디어 계정을 처음 만들었다. 페이스북 계정이었다. 우후죽순으로 내 소셜미디어 계정은 늘어났고 그 후 소셜미디어를 끊으려고 수차례 시도도 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스마트폰에 탑재된 앱도 지워봤고 몇 시간이나 콘텐츠를 올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자신과 내기도 해봤다. 온라인 프로필을 비활성화시킨 적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늘 수포가 되었다.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밀레니얼이니까 말이다. 언론계에서 일하는 나에게 소셜미디어는 졸업앨범, 일기, 신문, 사진첩, 개인 홍보팀 역할을 한꺼번에 다 하는 필수 요소였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유지되는 지인과의 관계도 적지 않았다. 이런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먼 곳에 있는 가족, 친구들과의 소통수단으로 십 대에 시작했던 소셜미디어에 22살이 된 나는 확실히 집착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스냅챗을 검색하며 몽롱한 정신을 서서히 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스크롤, 업데이트’하는 동작을 다시 잠들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화면을 통해 사는 느낌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셀카와 반려동물 사진, 그날의 의상, 셀러브리티 험담, 정치적 카오스, 광고, 해시태그 등으로 표현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정작 내 삶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수학을 증오하는 나지만 ‘좋아요‘와 ‘리트윗’ 수에 목매고 있었다. 내가 올린 콘텐츠에 누가 관심을 보였다는 ‘알림’이 안겨주는 도파민 중독증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통계에 집착하는 게 한심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하지만,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졸업 사진에 더 많은 ‘좋아요‘가 달린 걸 보고 시기심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나는 내 삶을 숫자로 평가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받은 ‘좋아요’ 수가 나보다 더 높다는 건 내 인기가 그만큼 더 낮다는 걸 증명한다고 믿었다.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다. 개인적인 내용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후 첫 반응이 뜰 때까지 화면을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개인적인 성과, 중요한 결정, 새로운 블로그 등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사항들이었지만, 왠지 소셜미디어 친구들의 인정 없이는 그 가치가 충분히 안 느껴졌다.

집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결혼, 승진, 해외여행 같은 미래의 중대사를 공유했을 경우 기대할 수 있는 지인들의 반응 수를 상상할 때도 있었다(유럽 횡단이나 청혼도 멋지지만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를 백 개 넘게 받는다고 상상해보라). 집착이 환상을 낳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없다는 걸 결국 깨달았다.

그래서 지난 3월 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있는 모든 데이터와 사진을 내려받은 후 계정을 제거했다. 스냅챗도 끊고 “2009년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라고 로그인 시에 뜨는 트위터 계정도 닫았다. 나는 그렇게 끊임없는 리트윗과 귀여운 남의 꼬마들 사진 세계에서 벗어났다.  

지난 16개월 동안 세상과 때로는 더, 때로는 덜 연결된 기분을 느꼈다. 셀카를 찍는 횟수가 현저히 낮아지면서 내 자존감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잘 못 나온 사진 때문에 신경질 내는 경우가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스타벅스가 내 글을 리트윗한 걸 자랑으로 여기던 여성에서 엄마와 동생으로부터의 문자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여성으로 바뀌었다(카일리 제너가 임신했다는 중요한 뉴스를 달리 어떻게 받겠는가?).

새로운 오프라인 삶에 적응하느라 뉴스에 접하는 방식과 남는 시간을 채우는 방식이 달라졌다. 소셜미디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지인들과 소통하며 일부 ‘친구들‘과의 우정은 인터넷에서만 존재한 우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이제는 내 글이나 사진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거의 매일 뜨는 ‘무슨 기념일’ 관련한 내용을 지나쳐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렇다고 은둔자가 된 것은 아니다. 개인 계정 없이도 소셜미디어에서 어떤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로근인 필요 없이 볼 수 있는 프로필, 구글 조회, 그리고 엄마의 비밀번호를 훔쳐 소셜미디어 세계를 가끔 방문한다. 중요한 건 소셜미디어가 내 순간순간을 더는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삶에 엔터테인먼트, 소통, 인정(칭찬)을 제공하는 통로 역할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무나 좋은 느낌이다.

물론 온 세상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것 같은 이 시대에 소셜미디어 프로필 없이 산다는 게 왠지 허전할 수도 있다. 한 예로 Nike+Run 클럽 앱에 보관됐던 몇 년 동안의 콘텐츠가 계정을 제거하면서 함께 날아갔다. 동생의 베를린 여행담도 거의 다 놓쳤다. 동생이 모든 콘텐츠를 스냅챗에 공유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들을 ‘친구 삭제’했다고 의심하는 가족·지인들과의 어색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도 그들의 생일을 모르고 지나쳤다.

불가능할 거라고 믿었지만 소셜미디어를 끊으면서 생긴 프라이버시를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만 알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좋다. 그 비밀이 아주 소소한 오늘 아침 메뉴밖에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나 자신이었다. 화면 뒤에 숨어 살던 나 말이다. 소셜미디어라는 플랫폼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아침,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를 확인하지 않은 지가 얼마 됐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 삶의 운전석을 되찾았고 남과의 비교와 끊임없는 인터넷 소음이 없는 실제 삶에서 ‘나’라는 사람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했다.

사실 나는 내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소셜미디어를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찾지 못한 나머지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를 새로 정의하려고 했다. 실제보다 더 활동적이고 더 전문성 있는 더 잘 갖춰진 나를 말이다. 다시는 소셜미디어를 할 확률이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로는 소셜미디어를 끊어서 얻은 혜택이 그 손해보다 훨씬 더 크다.

소셜미디어와의 단절로 내 생산성, 관계, 세계관 등 모든 게 더 나아졌다. 나는 나를 140자 또는 280자로 정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소개‘는 물론 웹사이트 전부로도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 적어도 현재로는 - 그렇게 할 필요는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 누구의 삶과 정체와 가치도 기가바이트와 픽셀과 코드로 압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수천수만 개의 ‘좋아요’나 리트윗보다 나를 훨씬 더 기쁘게 한다.

 

*허프포스트US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소셜미디어 #밀레니얼 #중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