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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 비혼이지만 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의학적으로 나는 '노산' 연령이었고, 난임이었다.

이 글의 작가 앤젤라 하템과 그의 아들
이 글의 작가 앤젤라 하템과 그의 아들 ⓒCourtesy of Angela Hatem

아이를 갖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과학적으로 내 몸이 알아서 임신에 필요한 상태가 될 줄 알았다. 나는 전통적으로 아이를 많이 낳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는 12명의 형제가 있고, 아버지에게는 8명의 형제가 있다. 난 다섯 명의 형제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본인이 아무 남자 옆에 앉기만 해도 임신할 수 있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그럴 정도로 나는 임신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을 녹록지 않았다. 막상 임신을 마음먹고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내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임신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독신 여성으로 아이를 갖는 일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첫 번째, 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임신하려면 익명의 기증자가 제공하는 정액을 사용해야 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필요한 일이기에 받아들였다. 둘째, 의학적으로 내 나이는 이미 ‘노산’으로 분류되는 38세였다. 과학적으로 이 나이에 임신은 좀 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사실이다.

난 임신에 매달리지 않았고,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믿었다. 35세 때 한번 아이를 갖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지만, 싱글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혼은 고려해본 적 없었지만, 가능성은 항상 열어 두었다. 어느덧 38세가 됐고 난 여전히 미혼이었다. 파트너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내 아이를 갖고 싶었다. 결혼은 평생 안 해도 상관없지만 내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38세가 된 4년 전, 난 결심 했다. 자궁과 난소를 검사하고 임신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본문과 관계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본문과 관계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Ute Grabowsky via Getty Images

처음 임신 준비를 할 때 정말 두렵고 힘들었다. 38세라는 나이가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독신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내 주위에는 날 지지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사는 인디애나폴리스주에는 친척이 많았고 직계 가족은 사우스플로리다주에 살고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주에서 사우스플로리다주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여 걸릴 정도로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다. 물론 몇몇 지인들은 차라리 고양이를 입양해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95세 할머니는 차라리 카톨릭 보육원에서 귀여운 여자아이를 입양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셨다. 사실, 나도 입양을 알아보긴 했지만 체외 수정에 드는 비용과 맞먹는 비용이 들었다. 또한 나는 독신이기에 입양하면 훗날 생모에게 양육권을 뺏기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입양은 훌륭한 일이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직접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먼저 임신 시도를 해보고 입양을 고려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고, 주위의 지지도 받았다. 경제적으로 부자는 아니었지만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임신에 필요한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주의 보험은 임신 관련 치료를 지원하지 않기에, 나는 우버(Uber-택시) 기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필요한 돈을 모아야 했다. 드디어 모든 게 준비됐다고 느낀 순간, 뜻밖에도 혈액 검사 결과에서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혈액 검사 결과, 난소의 수치가 너무 낮다는 말을 들었다. 과학적인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내 난소 수치가 나이에 비해 낮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여성의 일반적인 난소 수치보다도 낮고 난자의 수도 부족하다고 나왔다.

이미 시작도 전에 실패한 기분이었다. 난 당연히 임신 능력도 유전된다고 믿었다.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아이를 여러 명씩 낳듯, 나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유감스럽게도 임신 능력은 유전이 아니었다. 인생 처음으로 내 몸이 싫어졌다. 어쨌든 현실은 냉혹했고 내 몸은 난소 수치상, 임신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이 무섭고, 걱정됐지만 아직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양보다 질이에요”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단 하나의 난자만 잘 나오면 돼요”라면서 다시 도전할 힘을 주었다. 그 말에 완전히 설득됐다기 보단,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임신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덧 38세가 됐고 난 여전히 싱글이었다. 파트너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내 아이를 갖고 싶었다. 결혼은 평생 안 해도 상관없지만 내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임신을 시도했고 여러 번 실패했다. 다시 도전했지만 돌아오는 건 실패였다. 일곱 번의 시술 끝에 남은 건 공허함 뿐이었다. 수정 방식은 불임 치료에서 가장 덜 침습적인 방법이고 신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정자는 국가 공식 정자은행에서 구입해야 했는데, 매번 택배비 포함 약 740달러(약 87만8010원)가 들었다. 매번 배란기 테스트기를 사용해 임신 가능한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 후 클리닉을 방문해 자궁 속으로 카테터에 밀봉된 정액을 밀어 넣고 약 2주간 기다려야 했다. 2주 후에는 임신 여부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매번 실패할 때마다 다음번 생리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또 반복이었다. 엄청난 노력에 비해 남는 건 공허함 뿐이었다. 악순환이었다. 몸도 마음도 망가지고 내 자금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난임 전문가가 내가 임신할 수 있는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체외수정이라고 알려 줬다. 하지만 체외수정은 비싸고 임신이 보장되지도 않았다. 인디애나폴리스주에서 체외수정 시술을 하려면 거금이 들었다. 아직 엄마가 되고 싶은 꿈은 여전했지만, 일곱번의 실패를 겪은 터였다. 난 내 인생을 투자하면서까지 이렇게 할 일인지 묻기 시작했다.

만약 생물학적으로 임신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옵션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했다. 자금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해보고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안됐다. 미국 내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은 난임 클리닉을 찾아봤다. 뉴욕주의 시러큐스 지역에서 우연히 ‘CNY 인공수정’이라는 병원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인디애나폴리스주에서 받은 견적과는 큰 차이가 나는 시술 당 3900달러(약 462만330원)에 체외수정을 시술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체외수정 시술을 위해 빈약한 내 난자를 품은 채 뉴욕으로 향했다.

ⓒAleksei Morozov via Getty Images

CNY에서 체외수정 시술 실패를 두 번 겪었다. 그 사이 난 39세가 됐고, 난자 수치만큼이나 기대치도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임신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시도했지만 좋은 결과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난 실패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패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이 일에 노력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힘껏 싸우고 있었지만, 점점 의지도 사라지고 돈도 바닥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고 다짐했다. 엄마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려해 보기 전에 내가 직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인 체외수정은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날 지지해 주던 많은 사람도 기대를 잃어갔다. 그들은 나를 연민했고, 내가 헛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고, 어떨 때는 오히려 그들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슬플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임신을 시도할 때는 부끄럽기도 하고 마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짜증도 났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마음먹고 시술을 받았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받은 결과지에 ‘임신’이라는 마법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멋진 소식에 10분 동안 나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마치 디즈니 공주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이한 느낌이었다.

12분 후에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만약?’이라는 불확실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유산, 사고, 예상치 못한 일 등 임신 중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2년 중 대부분을 나쁜 소식에 시달렸다. 그건 단박에 극복하기 어렵다. 하지만 곧 내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임신을 시도하고 아이를 낳은 과정이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난소 수치가 다른 사람보다 낮다는 말을 들었다.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아들을 보고 있으면 2년 동안 노력한 보람과 그 모든 고통과 눈물, 에너지와 쏟아부은 돈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에 실린 독자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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