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반도발 세계평화의 꿈

  • 배명복
  • 입력 2018.06.21 14:18
  • 수정 2018.06.21 14:19
ⓒJonathan Ernst / Reuters
ⓒhuffpost

무불통지(無不通知). 지난주 김용운(91) 박사를 인터뷰하면서 떠오른 단어다. 구조주의, 카오스 이론, 노장사상, 정신분석학, 철학과 종교, 문명과 지정학으로 종횡무진 이어진 그의 사변(思辨)은 천학비재(淺學菲才)가 감히 쫓아갈 엄두를 낼 대상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이름난 수학자다. 구조주의 수학에서 출발해 동서고금의 과학과 인문학을 통섭한 끝에 ‘원형(原型) 사관’이란 나름의 역사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한 세대 이상 연배 차가 나는 기자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며 자신의 업적을 낮추는 겸손함에서 학문과 인품의 경지를 실감했다.

그는 ‘원형(ethno-core)’을 민족이나 집단이 지닌 독특한 성격으로, 문화를 형성하고 역사의 전개 양식을 결정하는 가치체계라고 설명한다. 원형을 중심으로 복잡계의 관점에서 역사 현상을 파악하고 관찰하는 새로운 역사철학이 그가 정립한 원형사관이다. 민족 단위 집단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의 일환이다.

김 박사는 19세기가 서구 세력에 의한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역습으로 막을 열었다고 말한다. 역사와 전통, 종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선을 그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이 9·11 테러를 불러왔고, 이슬람국가(IS)의 테러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동아시아의 경우 카오스의 중심에 한반도의 희생이 있었고, 그 원한에 대한 약자의 역습이 북한의 핵무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세계사적,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라고 김 박사는 말한다. 겉보기에는 누가 강자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서 북·미 정상이 만난 것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역습이 거둔 성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미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핵무력을 완성함으로써 ‘공멸의 구도’를 만들어낸 김정은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게 그의 평가다. 

김정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마음에 든 소개팅 상대의 전화번호를 따듯이 도널드 트럼프는 김정은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에서 블라디미르 푸틴까지 김정은을 못 만나 안달이다. 중재외교로 한반도 평화의 문을 연 문재인 대통령의 몸값도 크게 올랐다. 한국 지도자가 국제사회에서 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은 우리 현대사에 일찍이 없었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소위 전문가일수록 비판적이다. 특히 미국 주류언론은 주기만 했지 받은 건 없는 회담이라며 비판 일색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서명한 공동성명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도, 비핵화 시간표도 없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란 선물을 김정은에게 안겼으니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Jonathan Ernst / Reuters

 

하지만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핵심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대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최대한 예우를 갖춰 그를 대했으며 앞으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점은 비핵화를 북·미 관계 개선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임을 트럼프가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상호신뢰 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공동성명 문구는 북한 핵 문제를 바라보는 미국 측 시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미국은 비핵화가 전제돼야 북·미 두 나라가 신뢰 구축을 할 수 있고,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트럼프는 상호신뢰가 쌓일 때 비핵화도 진전될 수 있다는 논리를 수용했다. 북한 핵 문제의 본질이 상호 적대 관계에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북한 핵이란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악성종양을 초래한 체질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북한 비핵화는 비핵화의 단계별 이행으로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비핵화의 난관을 돌파하는 상호작용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CVID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와 동북아 차원을 넘어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발(創發)하는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김 박사는 말한다.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에 큰 상처를 남긴 체질화된 사대(事大) 의식에서 벗어나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동북아공동체의 중심이 될 때 한반도는 지정학적 굴레에서 벗어나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견뎌낸 구순 노(老)학자의 고언이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문재인 #북미정상회담 #트럼프 #싱가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