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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수어통역사에게도 신조어의 등장은 당황스럽다

빼박캔트, 혼밥각 등.

ⓒ한겨레

한국방송2(KBS2)의 ‘5시 뉴스’에는 앵커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농아인에게 뉴스를 들려주는 수어통역사이다. 화면에는 오른쪽 하단에 작게 나오지만, 듣거나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메인 앵커다.

수어통역자격고시가 처음 실시된 1997년 이후 집계된 전문 수어통역사는 약 1500명. 그중에서 텔레비전 통역을 하는 이들은 50~60명 정도다. 통역사 수요도 많고 한국 농아인 수만 약 30만명이지만, 수어통역을 하는 프로그램은 별로 없다. 경력 26년의 베테랑 통역사인 조성현씨(52)를 17일 만나 텔레비전 수어통역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현재 방송 3사 중에 수어통역을 하는 프로그램은 한국방송 7개(뉴스 6개+장애인 프로그램 1개)이고, 문화방송은 4개(뉴스 3개+장애인 프로그램 1개), 에스비에스는 뉴스 2개다. 1989년 장애인복지법이 만들어진 이후 조금씩 늘었지만, 공영방송 조차 현행법상 수어방송 의무방영 최소치인 5%만 간신히 지키고 있는 상황이다. 조씨는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등 비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들도 보면 좋은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며 “보다 많은 프로그램에 수어통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2년 장애인들의 삶을 다룬 사랑의 가족(KBS1)을 시작으로 수어통역을 시작했다. 20대 중반에 장애인 친구가 쓰는 ‘손말’ 의미가 궁금해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뉴스방송에 뛰어들었다. 26년간 뉴스는 물론 1997년 대선 후보 첫 텔레비전 토론회, 평창 올림픽 개·폐막식 등 한국의 역사의 현장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가장 힘든 통역으로 지난 6일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선고 생중계’를 꼽았다. “판결문 통역은 처음이었어요. 판사가 두시간 동안 쉼없이 말을 하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다 보니 저도 헷갈리더라고요. 끝나고 나서 판결문을 연구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요즘에는 신조어도 수어통역사들을 당황시킨다. “‘빼박캔트’, ‘혼밥각’, ‘급식충’ 등이 대체 뭔말인지 몰라 처음에는 자음·모음으로 보여주는 지화로만 한 적도 있어요.” ‘사스’, ‘메르스’, ‘탄핵’ 등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등장하면 농아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름은 보통 지화로 하는데 ‘박근혜’, ‘최순실’ 등은 특징을 잡아 만든 수어이름을 사용한다. 세월호는 여전히 지화로 한다. 왜? “‘세월호’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농인들에게 ‘세월호’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예요”

2016년 공식 명칭이 ‘수화’에서 ‘한국수어’로 바뀌는 등 하나의 언어로 인정받았지만, 수어통역사 처우는 좋지 않다. 그는 “수어통역사들끼리는 우리를 섀도우맨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방송사별로 차이가 있지만 통역료도 높지 않고 1990년대 통역료가 지금도 거의 그대로다. 에스비에스만 연간 단위로 계약서를 쓴다. 수어통역사를 존중해주지 않는 문화도 아쉽다. 조성현씨는 오전 10시40분 ‘지구촌 뉴스‘(20분), 오후 2시 ‘뉴스타임’(8분), 오후 ‘5시 뉴스‘(20분), 밤 8시30분 ‘글로벌 24’(25분)를 위해 하루종일 한국방송에 머무는데, 대기 공간이 없어 차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그는 “많은 수어통역사들은 대기하는 공간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어를 모르는 제작진과 일반 시청자들은 통역사들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꾸준히 노력한다. “내가 잘 이해해야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진다. 조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신문부터 보고, 하루종일 뉴스를 듣는다”고 했다. 필요하면 법률, 의학 공부도

한다. 튀지 않으려고 반지, 귀걸이, 시계는 물론 줄무늬 옷도 입지 않는 등 그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가장 편한 통역을 제공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도 많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경계하지만 도저히 자제하기 힘들 때도 있다. 4년 전 세월호 참사 때와, 며칠 전 4주년 추도식을 통역하면서 눈물이 흘러 수어를 하는 척 닦기도 했다.

그는 “수어를 배운지 3개월 때 자원봉사를 갔던 장애인 체전에서 너무도 행복해하던 그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2월 한국수어통역사협회를 만든 그는 “통역사들의 처우 개선뿐 아니라, 농인들을 위해 같은 단어라도 지방마다 다른 수어를 통합한 수어사전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장애인·비장애인 구분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며 저녁방송 대기를 위해 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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