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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 조은
  • 입력 2018.06.08 10:02
  • 수정 2018.06.0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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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ByoungJoo via Getty Images
ⓒhuffpost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까지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비/일상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때 언제쯤 어느 아침 우연하게 왼손과 오른손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바둑판을 뒤집는 일은 강자만이 할 수 있다는 현실에 새삼 허탈해졌을 때다.

일어날 때 스트레칭이라도 하면서 일어나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를 실행에 옮겨볼까 그런 기분으로 누워서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한 채 두 손을 쭉 뻗었다. 역광으로 보인 두 손의 크기가 너무 달라 보였다. 이게 뭐지 하면서 커튼을 걷고 햇살을 손에 받으며 찬찬히 두 손의 크기와 손가락 모양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왼쪽의 엄지보다 오른쪽의 엄지가 티 나게 굵었다. 검지는 큰 차이가 안 나는 듯했지만 중지는 모양 자체가 완연하게 달랐다. 연필 세대답게 오른쪽 중지 첫 마디 옆구리는 튀어나왔고 군살도 박여 있다. 생각해보니 이미 중학교 때쯤에 중지와 검지에 연필을 꽉 잡고 꾹꾹 눌러쓰는 버릇이 흔적을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뭔가 아는 척하기 좋아했던 친구가 “아바이 동무 손 보니 안 되갔…” 이북 사투리 흉내를 내면서 북한에서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손 검사부터 해서 수용소로 보낼 거라고 겁주던 생각까지 떠올랐다.

손의 계급성을 말한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보다 빨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오며 왼손과 오른손을 겹쳐도 보고 비교하면서 들여다보니 왼손과 오른손이 같은 내 손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수저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심한 오른손잡이였다. 왼손과 오른손이 70여년의 쓰임새에 따라 이렇게 달라져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 것은 좌우 프레임에 갇힌 분단 70년의 강고함을 절감해야 했던 강박이 불러온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내 책상 위에는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라는 책자가 한달째 그대로 놓여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70년의 기록’이다. 저자가 보내왔는데 차마 책장을 못 열고 있다. 2년 전 문경 석달마을에 간 적이 있다. 2016년 제6회 ‘진실의 힘’ 인권상 심사위원회는 수상자로 채의진 선생을 선정했는데 수상자가 시상식 날까지 살아 계실지 확답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살아 계실 때 시상을 알리고 상패라도 전달하는 게 좋겠다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좇아 심사위원장으로서 급히 문경에 내려갔다.

김선주 심사위원, 송소연 ‘진실의 힘’ 상임이사, 강용주 이사 그리고 석달마을 사건을 언론인으로서 처음 알린 정희상 기자와 함께였다. 그는 <빨간 베레모>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채의진 선생 병상을 찾아 상패를 전달하고 바로 학살현장으로 갔다. 모두 합쳐 127명이 살고 있던 산골마을에서 86명이 학살된 터는 포도밭도 되고 고추밭도 되어 있었다. 학살 피해자 중 42명이 여자였고 22명이 10살 이하 어린이였다. 채의진 선생은 그때 열세살 나이로 현장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누이 형수 등 가족 아홉명을 잃은 생존자다.

사건이 터진 날은 6·25가 터지기 전해인 1949년 12월24일이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에 들어가는 설렘으로 그가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동네 어귀로 들어섰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불려 나와 모여 있었고 눈앞에서 총구가 불을 뿜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은 그의 형은 바로 총에 맞아 어린 그를 덮치며 쓰러졌다. 그 덕에 그는 살아남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를 공비의 학살 만행으로 규탄했다. 실상은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한 한마을 학살이었다.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군 당국은 바로 사태 파악을 했지만 대외비로 30년간 묶고 침묵했다. 열세살 소년이 스물다섯 청년이 되었을 때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넘어가자 석달마을 유가족들은 국회에 진실을 밝힐 청원을 냈다. 그러나 바로 5·16이 터지면서 이를 주도한 채의진 선생 등은 사상불온자로 찍혀 몸을 숨겨야 했고 뒤이은 5공과 6공에서는 더욱 엄혹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미 국방부 자료가 해금되고서도 15년이 지나서야 채의진 선생이 그 자료의 소재를 알고 미국에 건너가 복사해 온 자료를 제출할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공비에 의한 만행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숨막힘과 마주하기 싫어 <빨간 베레모>를 미뤄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당시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만행을 못 막은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되었다는 이야기에 연상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싫어서다. 문경군수는 별 탈 없이 승승장구했는데, 수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채문식 5공 때 국회의장이 바로 당시 문경군수였다. 그는 누릴 것 다 누린 후 회고록에서 당시에도 국군에 의한 만행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정치사의 어둠과 마주치려면 담력을 키우고 뜸을 들여야 한다.

문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간 심사위원들은 긴 침묵에 빠졌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지만 제6회에야 채의진 선생에게 이 상을 안겨야 했는지 착잡했다. ‘진실의 힘’은 힘없이 당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진실규명을 돕고 지원하는 시민단체다. ‘진실의 힘’ 인권상은 국가폭력에 이유도 모르고 당한 피해자들이 형 집행 후 나와서 진행한 소송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받아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금의 일부를 내놓아 만든 상이다. 지난 정권에서 대법원이 보상금 계산 착오라며 중간보상금 지급 후 보상금을 토해 내라고 한 배상 소송의 영향을 받아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다.(‘어떤 재판거래’가 국가폭력 피해자 배상금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 글을 쓰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과 진실 촉구의 상징이었던 빨간 베레모를 병상 옆에 두고 우리를 맞은 깡마른 아버지를 돌보던 채의진 선생 자녀들의 모습과 간병을 교대하던 대학생 외손자의 모습이 아프게 떠오른다. 거기에 겹쳐 한때 연구자로 관심을 쏟았던 월북자 가족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만났던 월북자 손녀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한 사례는 제주4·3 피해 가족으로 친할아버지는 월북했고 외할아버지는 진압 경찰인 경우인데, 한동네에서 친할머니는 그녀 외할머니한테 심사가 꼬이면 “군경 유가족 연금을 받아 좋겠다”고 심술을 부렸고, 외할머니는 그에 질세라 “빨갱이가 무슨 자랑이냐”고 싸워서 어린 시절이 늘 우울했다는 이야기로 구술을 시작했다.

또 한 사례는 80년대 후반 학번으로 대학가가 시끄러울 때 학생회장에 출마했다가 선거 끝날 때까지 집안에 연금당했다는 이야기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비교적 합리적인 아버지가 왜 그토록 심하게 자기가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걸 막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아버지와의 관계도 틀어졌는데 할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을 10년쯤 뒤에 알았다.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깊고 길다. 그런 그림자가 우리 손자녀들의 미래까지 덮치게 할 수는 없다.

‘멈춘 전쟁’ 속에 살았던 한반도에 종전이 선언될지도 모르는 ‘세기의 담판’을 앞두고 있는데 한국인들이 의외로 담담한 데 대해 외신들은 놀란 듯하다. 우리는 그냥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분단의 모순과 불의와 부조리의 일상에 맞서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부산에서 나진을 거쳐 유럽까지 가는 기차를 상상하는 일에 맘껏 들뜨고 싶다. 그러나 평화가 일상이 되는 일은 ‘빅딜’만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훈수를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희일비할 수도 없는 무명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몸짓은 좌파/빨갱이/종북 이런 단어에 겁먹지 않고 각자 선 자리에서 분단과 냉전의 상처와 경험을 조용히 쓰다듬는 정도인지 모르겠다. 온 힘을 다해 전쟁이 평화를 이길 수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일은 할 수 있다.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지난 촛불혁명의 경험은 그래서 값지다. 값지게 해야 한다. 깨어 있는 한 표가 아쉬운 시간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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