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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의 후유증 : 2차 가해는 피해자를 어떻게 무력하게 하는가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동료 직원 95%가 탄원서를 써준 사례도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22일 오전 서울 시내 모처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22일 오전 서울 시내 모처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문제 인식까지도 오래 걸렸고, 문제 제기까지는 더욱 오래 걸린 사건이다.” 지난 22일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를 대신해 전한 말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 피해 사실은 단번에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대처는 대개 비슷하다. 정신적 고통, 퇴사 또는 근무부서 이동 등을 겪은 뒤 벼랑 끝에 가서야 피해를 입 밖으로 꺼내게 된다.

간신히 용기를 낸 피해자 앞엔 공식처럼 2차 가해라는 또 다른 폭력이 등장한다. 가해자가 지닌 위력의 크기만큼 가해자를 비호하는 주변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해 사실을 의심하고, 사소한 일이라고 축소하며, 문제 제기 자체가 문제라고 비난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특별히 예민하고 조직을 위협하는 문제적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최악의 경우 ‘꽃뱀’으로 호명된다.


방조자들, 또는 가해자들

2차 가해는 신고 과정부터 사건 해결까지 단계마다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신고 단계에서 사건 담당자나 직속 상사는 되레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주관적인 판단으로 사건을 축소하기 일쑤다. “올해 퇴직인데 어떻게 그 사람을 자르냐.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는데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지 않으냐”는 식이다.

2018년 여성가족부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 성희롱을 공론화한 피해자의 27.8%는 피해 호소 후 2차 피해를 경험했다. 구체적인 피해 내용을 보면, 피해자의 35.7%는 ‘신고 이후 집단 따돌림이나 폭행’ 등을 당했다. 16.1%는 ‘파면이나 해임 등 신분상실 불이익’을 경험했고 12.9%는 직무 배제, 직무 재배치 등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조처를 당했다. 아울러 피해자의 23.8%는 ‘피해를 말했을 때 공감이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했고, 8.4%는 부당한 처우를 암시하는 발언 등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렵게 신고를 결심한 피해자들이 신고를 해도 공염불에 그치게 되는 셈이다.

ⓒ한겨레

 

과거 한국여성민우회가 상담했던 사례를 보면,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한 ㄱ씨에게 인사부는 ‘가해자의 퇴사 사유를 성희롱 건으로 퇴사한다고 밝히지 말고 희망퇴직으로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ㄱ씨는 “가해자가 조용히 나감으로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 이상한 것 같기도 했지만, 가해자가 나가게 되었으니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달 병가를 냈다가 복귀한 ㄱ씨는 되레 조직 내 ‘왕따’가 됐다. 가해자가 일을 그만둔 것은 미화되고, 피해자에 대한 험담이 오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회사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피해자를 고립된 1인 부서에 발령 내기까지 했다.

2차 가해자는 다양하다. 2015년 인권위 자료를 보면, 2차 가해자로 첫째로 꼽힌 이는 가해자(38.9%)다. 성희롱 사건을 회사에 알린 뒤 가해자가 사과를 하면서 “미안은 한데, 소문을 낸 여직원을 다 잡아오라. 다 소송 걸겠다”고 말했다는 경우(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도 있다. 그러나 동료(22.4%), 성희롱 고충 담당자(17.3%), 상급자(15.6%), 고용주(5.6%)도 피해자를 괴롭히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을 보면, 한 회사에서 상습적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은 상급자를 여성 직원들이 문제 삼자 관리자는 회의시간에 회사의 성희롱 행동규범 한줄을 읽고 막연하게 주의를 촉구하는 말만 한 채 가해자에게는 어떤 조처도 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방조를 넘어 “가해자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등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의 퇴사를 압박하는 등 피해자를 더욱 힘든 처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가해자가 중징계를 받은 뒤에 외부기관에 이의 제기를 하자 동료 직원의 95%가 탄원서를 써준 일도 있다.


위력의 후유증, 신고를 후회한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삼중고를 경험하게 된다. 신체적 피해와 감정적 피해에 더해 물질적 피해까지 겪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인권위가 진행한 ‘성희롱 구제조치 효과성 실태조사’에서 피해자의 43.5%는 2차 피해의 결과 수면 장애 등 신체적인 고통을 겪는다고 호소했고, 53.1%는 수치심과 두려움 등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아울러 성범죄 피해를 조직 내에서 신고하거나 경찰·인권위 등 국가기관에 호소한 이들은 결국 조직을 떠나거나 조직 안에서 불이익을 당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한다. 주변인들마저 조직적으로 피해자를 압박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 혐의로 고소하면 ‘회복’은 요원해진다. 신고를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rclassenlayouts via Getty Images

 

경기도의 한 노인단체에서 근무하는 ㄴ씨와 ㄷ씨도 오랜 직장 내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여기저기에 피해를 알렸지만 지금은 피해를 호소한 사실조차 후회할 정도다. 이들은 2014년부터 6년 동안 단체장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다. 여성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단체장은 수시로 “부부관계는 일주일에 몇번이나 하냐” 같은 말을 하며 성희롱을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올해 2월 경기도 인권센터에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피해 구제 신청을 했다. 인권센터는 3월 단체장의 발언이 성희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단체장은 ‘자신을 징계처분 받게 할 목적으로 성희롱 등 허위 내용을 신고했다’며 이들을 5월 무고로 고소했다.

2차 가해는 조직적으로 발생했다. 단체장은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직원들을 동원해 탄원서를 받아 회사에 제출했다. 탄원서에는 이들이 ‘수시로 남자 직원을 대상으로 성적인 유혹을 한다’거나 ‘신체 접촉을 유도하는 스타일이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인사를 하는 법이 없다’ 등의 내용이 빼곡하게 적혔다. 그사이 친하게 지낸 동료들도 하나둘 이들을 외면했다. ㄴ씨와 친하게 지냈던 한 동료는 ㄴ씨에게 “문제 제기로 인해 회사 분위기가 안 좋고 다른 사람들까지 근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회사는 인권센터의 권고가 있었는데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간을 분리하지 않았다. 업무 분리도 하지 않아 피해자들은 여전히 가해자와 대면하고 결재를 받아야 한다. 회사에 항의했지만 “가해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냐. 이 사람 없으면 회사가 망한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2차 가해의 상처는 깊고 잔혹했다. 이들은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며 정신과 약을 먹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한다. 6년간 성희롱에 시달렸지만, 문제 제기 이후 지난 1년의 상황이 오히려 더 고통스럽다. 무고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단체장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변호사도 선임했다.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은 문제 제기를 한 것 자체를 후회한다. ㄷ씨는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후회된다. 조직적으로 대응을 하니 무섭고 피해자 보호가 전혀 되지 않아 두렵다”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 신고 집단이 미신고 집단보다 더 큰 업무상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지난해 인권위 조사 결과를 보면, 성희롱 피해를 신고한 집단 중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답한 비율은 28.3%였지만, 피해를 참고 넘어간 집단에선 20.3%로 신고 집단보다 사직 희망 비율이 낮았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업무상 어려움을 호소하는 정도 또한 신고 집단이 미신고 집단보다 더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피해 회복이 아닌 피해 가중으로 작동한 것이다. 2차 피해로 인해 피해자들이 피해를 드러내지 않고 되레 숨기게 되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피해 구제 방식을 보완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해야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조사의 공정성을 높이고 2차 피해를 방지해 기존 피해의 진실이 드러나게 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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