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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국가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가능했던 5가지 이유

  • 이진우
  • 입력 2018.05.28 19:51
  • 수정 2018.05.28 19:53
런던-아이리시 낙태 권리 캠페인 페이스북 캡처
런던-아이리시 낙태 권리 캠페인 페이스북 캡처

66.4%. 25일(현지시간) 낙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하는데 찬성한 아일랜드 유권자의 비율이다. 이로써 낙태 시술을 한 여성에게 최장 14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던 헌법 조항은 폐지 수순을 밟는다. 35년 만이다. 대신 정부는 임신 12주 이내 중절 수술은 제한을 두지 않고, 12∼24주 사이에는 태아가 기형이거나 산모 건강에 중대한 위험을 미칠 우려가 있을 경우에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연말까지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인구의 88%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에서, 어떻게 이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비극적인 죽음

2012년 10월, 의사 사비타 할라파나바르(Savita Halappanavar)의 죽음은 ‘낙태죄 폐지’ 운동이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비타는 유산 위기로 생명이 위독해져 아일랜드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낙태 시술을 요청했지만 거듭 거부당했다. 태아가 살아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한 상황인데도 그의 낙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비타는 결국 패혈증이 발생해 숨을 거뒀다. 사비타의 비극적인 죽음은 ‘낙태 처벌’에 대한 분노를 전국적으로 촉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가 됐다.

사비타의 부모님. 아이리시타임스 캡처
사비타의 부모님. 아이리시타임스 캡처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한다는 투표 결과가 나온 뒤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죽음을 추모하는 메시지가 그의 벽화 옆에 가득 붙었다.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한다는 투표 결과가 나온 뒤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죽음을 추모하는 메시지가 그의 벽화 옆에 가득 붙었다. ⓒREUTERS

뉴욕타임스는 아일랜드 국민들이 투표 결과가 나온 뒤 사비타의 초상이 그려진 더블린 시내의 벽화에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어요”란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사비타의 이야기는 ‘낙태를 금지한 아일랜드의 수정헌법 8조 폐지 요구’와 동의어가 됐다”며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해오던 이들에게도 사비타의 죽음이 가시적인 전환점이 됐고, 그의 이름이 구호가 됐다”고 분석했다.

사비타의 부모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투표일에 우리 딸 사비타의 운명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가족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폐지 요구에) ‘예’라고 투표하길 바란다”라며 사비타의 사진이 수정헌법 8조 폐지 캠페인에 이용되는데 동의했다. 아이리시타임스는 낙태죄가 폐지된 뒤 사비타의 부모가 “정말, 정말 행복하다”고 소감을 전했다고 밝혔다. 또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새 법안이 도입된다면, ‘사비타법’으로 이름짓길 바란다는 요청을 받았다고도 전했다.

추락한 종교의 권위

종교의 권위가 과거에 견줘 추락한 점도 이번 투표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수정헌법 8조는 바로 1983년 가톨릭 교회가 강력하게 요구해 만든 조항이었다. 제정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80%는 매주 미사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20%대에 불과하다. USA 투데이는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의 법학자인 오란 도일(Oran Doyle)의 발언을 인용해 “가톨릭 교회가 대다수의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아일랜드 성직자들이 일련의 성범죄에 연루된 적이 있는데다, 수십년 동안 이어진 임신한 미혼 여성을 향한 학대 행위에 반발이 쌓였다는 분석이다. 더블린 대학 사회학자인 매리 매콜리프(Mary McAlliffe) 교수 역시 “성직자의 발언이나 종교적인 규칙이 낙태와 동성 결혼, 이혼 등 현대 가정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반인들에게 더이상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이번 투표 결과도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일어났던 많은 진보 운동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밝혔다. 교회의 영향력은 과거의 그림자로 여겨진다는 설명이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홈페이지 캡처
아일랜드 '시민의회' 홈페이지 캡처

‘시민의회’의 힘

아일랜드의 ‘시민 의회’가 꾸준히 낙태에 대한 논의를 해온 점도 영향을 끼쳤다. 의장 1명과 99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아일랜드 유권자들을 대표할 수 있도록 무작위로 선출된 이들로 구성됐다. 시민의회는 아일랜드가 미래에 직면할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다. 이들이 만든 보고서는 아일랜드 국회에 제출되고, 국회에서 이뤄지는 논의의 기초가 된다. 아일랜드 언론 더 저널은 시민 의회가 5주 동안 의사, 변호사, 여성 등으로부터 증언을 들었고 지난해 이미 수정헌법 8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민의회 내에서 투표를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최대 12주 동안 요구가 있을 경우 낙태가 가능해야 한다”는 의견에 투표했다. 아일랜드의 국민들도, 결국 이번 투표를 통해 ‘시민의회’의 논의 결과에 동의한 셈이다. 그리고 국회는 ‘시민 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정헌법 8조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더 저널은 특히 “정치인들이 낙태처럼 민감한 이슈에 나서서 논의하자고 먼저 제안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라며 “(시민의회가 낙태와 관련된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이번 투표가 가능했다”고 꼬집기도 했다.

정치인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

더 저널은 그럼에도불구하고, 몇몇 정치인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이번 투표 결과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아일랜드에서도 선거를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낙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실제로 더 저널이 2016년 모든 아일랜드 국회의원들에게 ‘수정헌법 8조’의 개정에 대해 물었지만 응답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낙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가 떨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변화가 일어났다. 국회 안에서 낙태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클레어 데일리(Clare Daly) 의원은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고 나섰고, 브리 스미스(Br?d Smith) 의원은 직접 자신이 겪은 낙태 경험을 용기있게 밝혔다. 또 이번 국회는 시민의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토대로 위원회를 꾸려 적극적으로 논의해 호평을 받았다.

'#HomeToVote’를 독려하는 전단지
'#HomeToVote’를 독려하는 전단지

SNS로 확산한 ‘#HomeToVote’ 캠페인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이끌어낸 투표 뒤엔 트위터 등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벌어진 ‘#홈투보트’(#HomeToVote) 캠페인이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외국에 거주하다가 낙태죄 폐지 투표를 하기 위해 입국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큰 화제가 됐다. 이들은 아일랜드 항구나 공항 또는 투표소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고 ‘#HomeToVote’란 해시태그와 함께 ‘인증샷’을 올렸다. ‘#HomeToVote’ 운동은 2015년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투표를 할 때도 실시한 바 있다. 캠페인 지지자들은 “2015년 당시 투표를 위해 국외에 거주하던 아일랜드인들이 돌아온 것처럼, 이번에도 투표권이 있는 아일랜드인들이 가능한 많이 고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미국 ‘슬레이트’ 매거진은 “아일랜드는 부재자 투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국외에 살고 있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투표를 위해 고향으로 가는 여행을 선택했고, 이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HomeToVote’란 해시태그가 등장했다”며 “만약 당신이 이번주 인터넷에서 ‘좋은 일’의 예를 보고 싶다면 그 해시태그가 있는 게시물을 보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슬레이트’ 매거진은 또 이 해시태그 움직임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민주주의의 실현에 관한 최상의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가디언 역시 “많은 이들이 왜 ‘낙태죄 폐지 투표’를 위해 귀국을 하는지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이유를 밝혔고, 이에 공감하는 반응이 번져나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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