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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 29일 15시 22분 KST

23년 전 오늘, 멀쩡한 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이 발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6월29일 저녁 5시 57분께,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행정 관공서의 전화가 시민들의 폭주하는 신고로 불통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취재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믿지 못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죽었다.

“현재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백화점 임원실 회의장으로 다급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오늘로부터 23년 전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40분께, 백화점 시설부장이 경영진에게 긴급히 대피할 것을 알리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경영진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모두 건물 밖으로 신속하게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대피한 건 그들 뿐이었습니다. 당시 백화점 안에 있던 손님과 직원을 포함한 1500여 명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1995년 6월 30일 치.

결국 잠시 뒤인 오후 5시 57분께. 백화점 건물은 5층 왼쪽부터 아래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지하 4층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5층 건물 2개동 가운데 북쪽 A동이 완전히 붕괴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초였습니다.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이 발생했습니다. 단일 사고로는 건국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고로 기록된 ‘삼풍백화점의 붕괴 참사’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 1일 문을 연 강남의 대표적인 고급 백화점이었습니다. 바로 뒤에 있는 고급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 단지를 배후 상권으로 삼아 이미지를 차별화해왔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부실 설계와 부실 시공은 화려한 치장과 고급 상품에 가려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뇌물, 비자금 등 비리로 얽힌 정경유착의 문제점까지 드러나면서 더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준 삼풍 회장.

당시 삼풍건설그룹의 이준 회장은 백화점 붕괴 뒤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가면서 한 언론을 향해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것이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고 말해 국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고 당일

-“기둥 안에 철근이 없다”

삼풍백화점 건물은 사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1995년 6월 29일 오전부터는 백화점 5층에서 ‘이상’ 조짐이 눈에 띄게 발견됐습니다. 이날 오전 8시께 건물 곳곳에서 큰 균열 현상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식당가가 있는 5층에서는 천장 일부가 내려앉았고 바닥이 갈라졌습니다. 옥상도 기울어졌으며 4층 바닥 일부는 침하 현상까지 보였습니다. 직원들이 백화점 쪽에 신고했지만 경영진들은 천장이 무너진 매장에 대해서만 영업을 중지토록 지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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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5년 6월 30일 치.

하지만 오전 10시께 균열 가속과 함께 진동도 커지자 백화점 쪽은 가스 밸브를 잠근 채 영업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오전 11시께에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백화점 전체의 에어컨 가동까지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환풍기의 진동음이 몇 배나 크게 들렸습니다. 낮 12시께부터는 식당가 다른 영업점에서도 천장에서 물이 새고, 바닥이 기울었습니다. 5층 식당가에 손님들이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식당 직원들도 일부 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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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에서 한 구조대원이 동강 난 기둥을 치우고 있다. 지름 1m에 가까운 기둥 안에는 철근이 여남은 가닥밖에 들어 있지 않아 해체 과정에서도 쉽게 동강 났다. 

백화점 쪽은 두 차례나 간부 대책 회의를 가졌으나, 일반인의 출입통제를 하지 않은 채 1~3층과 지하 1층 식품매장의 영업을 강행했습니다. 오후 1시께는 백화점 간부가 다시 5층 식당가로 찾아가 바닥을 뜯어본 뒤 “철근이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돌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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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

오후 4시께부터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인근 아파트 주부들이 백화점 지하 1층 슈퍼마켓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과 손님들이 건물 붕괴 위험을 직접적으로 느낀 건 붕괴 5분 전인 오후 5시 50분께였습니다. 건물이 5층 왼쪽부터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고,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위험을 느낀 일부 사람들이 매장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5분쯤 뒤 ‘꽝’하는 소리와 함께 백화점 건물이 5층부터 차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직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백화점 안에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사고 원인

-불법 증축과 부실시공

한겨레 자료사진
붕괴 사건 전의 삼풍백화점의 모습.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백화점 붕괴 참사는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습니다. 본래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주거용이었습니다. 삼풍건설그룹이 지었던 외인 주택 단지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풍 쪽은 아파트와 함께 백화점을 짓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해 무리하게 공사를 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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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에서 엘리베이터 탑 추가 붕괴를 맏기 위해 철 구조물을 융합하고 있다.

삼풍 쪽은 5층을 무단 설계변경으로 불법 증축하고, 그 위에 애초 설계와 달리 무게 200t 규모의 냉각탑을 올렸습니다. 아울러 5층 외벽의 기둥도 4층까지의 기둥과 맞물리지 않은 채 설치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무게를 못 이긴 4, 5층의 구조물이 먼저 무너져 내리면서 전체 붕괴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5층 외벽은 철골 시공 없이 콘크리트로만 시공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공무원 뇌물, 정경유착, 건설업계 비자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원인으로 지적된 잦은 설계변경과 증축, 용도변경 등에는 구청과 삼풍의 유착이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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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청 건축1계 사무실. 삼풍백화점 인허가를 둘러싸고 유착 의혹을 받고 있는 직원들이 모두 행방을 감추는 바람에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삼풍건설이 1989년 7월부터 1990년 4월까지 세 차례 설계변경을 했으며, 사전승인 없이 매장 내부를 300여 평(약 991㎡)이나 넓혔는데도 서초구청이 승인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공무원들은 건축법을 위반한 삼풍백화점에 대해 가사용 승인을 내렸습니다.

삼풍 부실과 관련해서 전·현직 서초구청 공무원들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자 관련 공무원들은 휴가를 내거나 무단결근하는 등 잠적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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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11일 치. 

결국 서초구청 공무원 5명은 네 차례에 걸쳐 6050만원의 뇌물을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인허가를 해주면서 한 번도 예외 없이 뇌물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의 배후에 있던 건설업계의 비자금 관행도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건설업계 비자금이 공직사회와 업계 간의 유착의 토대가 되고, 이것이 부실공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구조

-허술한 구조 지휘 체계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 서초동 서울교대 체육관 주변에 텐트를 치고 기거하면서 실종된 가족의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한 실종자 가족이 텐트 밖으로 내리는 부슬비를 넋잃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삼풍백화점 참사에서 허술한 구조 지휘체계도 실종자 가족과 시민들을 애태우게 만들었습니다.

사고 발생 5분 만에 119구조대와 군·경 등이 출동했으나 구멍 난 구조 지휘 속에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는 따로따로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민간인들의 현장 접근 통제 및 구조요원의 효율적인 배치 등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구조 작업에 나선 여러 기관의 지휘관들이 서울시대책본부와 협의 없이 독자적인 지시를 내리는 일이 빈번했고, 이에 따라 각 기관에서 동원된 구조요원들도 제각각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 별도로 지시를 받았습니다. 경찰특공대원과 자원봉사자 7명 등은 사체가 매몰된 B동 지하 1층에 들어가려다 건물 경비를 맡은 군이 출입을 통제하느라 1시간동안 구조작업을 벌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소방대원과 경찰, 군이 서로 상급기관의 명령에 따라 비좁은 공간에 각자 출동해 서로 자리싸움을 하는 웃지 못할 장면까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

게다가 전문지식 및 장비 부족으로 현장 자원봉사자들의 말에 따라 구조 활동의 내용이 원칙 없이 바뀌는 일까지 적지 않아 혼선이 가중됐습니다. 또 무선 연락 장비도 갖추지 않은 인력들이 현장에 투입됐다가 필요한 장비를 가져다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30m~50m 떨어진 지휘 대책 본부를 오가느라 구조 활동이 늦어지기도 했다는 구급대원들의 얘기도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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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를 옮기고 있다.

이러는 사이 환자들의 희생만 커졌습니다. 우왕좌왕하는 분위기 속에서 환자가 구조될 때마다 구조요원들은 각 병원 앰뷸런스에 환자를 싣는 것이 구조 과정의 전부였습니다. 병원으로 이송하기 전에 필요한 응급조처는 거의 생략됐습니다. 당시 사고 현장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해온 응급의학 전문가인 서울대병원 윤여규 응급처치부장은 “사고 발생 71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다가 2시간 만에 숨진 이은영씨만 해도 현장에서 즉시 기관절개 등의 응급조처가 있었다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 당시 구조현장의 무질서와 원시적인 응급의료체계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잔해물 쓰레기장과 한강변에 버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잔해물의 처리를 두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고로 인해 발생한 실종자는 164명(7월 21일 기준)으로 집계됐고, 부분 사체 55점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결과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에서 대형 크레인과 구조장비를 동원해 희생자 수색작업 및 정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사고대책본부는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해 사고 잔해를 난지도 쓰레기장과 염곡동 폐건축자재집하장, 한강시민공원과 일반 건설 현장에 임시 처리해 실종자 가족들의 큰 반발을 샀습니다.

대책본부는 논란이 커지자, 난지도 재수색 과정에서 뼈 4점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실종자 가족들은 “유골과 유품이 섞여 있을 잔해물을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해온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며 거세게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거듭되는 대형 인재 국가 관리능력 의문”

와우아파트 붕괴,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 거듭된 대형 인재에 국민들의 충격과 불안감은 커졌습니다. 사고 때마다 되풀이한 정부의 ‘철저한 안전관리 점검’이 거짓임을 ‘사고’가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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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5년 7월 21일 치.

세계 주요 외신들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에 대한 비판을 내놓았습니다. 미국 시엔엔(CNN)방송은 “한국 정부가 잇따른 대형사고로 부실공사 추방을 강력히 천명한 상태에서 발생한 이번 사고로 국민들의 불신이 더욱 심화 됐다”고 전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한국에서는 최근 다리 붕괴(성수대교)와 가스폭발(대구) 등 수십명 규모의 희생자가 나는 대사건이 잇따르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고가 시공이나 관리상의 허점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있어 고도성장의 여파가 아닌가 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1995년 7월 1일 치.

독일 언론들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구조적 부실공사병폐. 눈가림식 처벌, 국민의 안전의식 결여 등 복합적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는 한국에서 공사규칙은 허울에 불과해 철근은 장부에만 기록하고 실제는 눈가림식으로만 집어 넣으며 기본적인 안전시설조차 마련해놓지 않고 있는 현실이 이런 재난을 불러오고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무너진 건물이나 다리의 부실공사가 3, 4공 또는 5, 6공 시절에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관리책임은 현 정권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몇 차례 이어진 참사에도 관련자들에 대한 문책이나 조직적인 구조체제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