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의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별세했다. 향년 101. 1918년 통영에서 맏이로 태어난 할머니는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22살 때이던 1939년 거제 장승포에 있는 고모 집에 가려고 부두에 나갔다가, 공장에 취업시켜 주겠다는 징용 모집자의 말에 속아 부산으로 갔다. 동생들을 키우는 홀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효심이 깊었던 할머니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김 할머니를 태운 배가 도착한 곳은 중국 다롄이었다. 일본군을 따라 중국에서 필리핀까지 끌려다니며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할머니는 1945년 해방 직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복득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한 뒤,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2007년 일본 나고야와 2011년 오사카에서 열린 증언집회에 참여해 자신이 겪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경험을 증언했고, 2010년 일본 중의원회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또 2012년 통영여고 장학금, 2013년 경남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2000만 원씩 기부했다.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다. 그러한 김 할머니의 뜻을 기려 경남도 교육청은 2013년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나를 잊지 마세요‘를 펴내, 도내 모든 초중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재로 사용하도록 했다. 경남도 교육청은 이 책의 일본어판과 영문판도 펴내, 일본과 미국에도 보냈다. 같은 해 통영 남망산공원엔 김 할머니를 상징하는 소녀상 ‘정의비’가 세워졌다.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치던 할머니가 자택 생활을 접고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으로 입원하게 된 때도 2013년 가을이다. 딸처럼 할머니를 보살피며 지역 활동을 펼쳤던 송도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 시민모임’ 대표는 “일상의 일을 손수 너무도 잘, 깔끔히 해 오시던 어머니는 심한 손 떨림과 함께 혼자서 일어서기가 힘들어지자 집에서의 생활이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병원생활을 시작하셨다. 언젠가는 다리가 다 나아서 꼭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꿈을 안고서...”라고 그 시기를 기억했다.
“내가 죽기 전 일본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죄를 받는다면 소원이 없겠소. 그래도 남은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는 족두리 쓰고 시집가서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소.”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되뇌었다는 소원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할머니의 작은 소망도, 일본의 사죄를 기다렸던 평생의 원도 풀리지 않은 채 할머니는 그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애썼던 할머니의 발걸음은 여기에서 멈추지만 그 뜻은 남은 이들의 마음에 새겨져 다시 이어질 터. 김복득 할머니 고통과 아픔 모두 잊으시고 이제 편히 잠드시기를.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