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6월 23일 14시 44분 KST

'나쁜 놈'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성희롱을 없앨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다

미국 국립 과학기술의학아카데미의 연구 결과, 놀랍게도 '개인 가해자'와는 별로 연관이 없었다.

Jose A. Bernat Bacete via Getty Images

성희롱이 일어날 때 가해자, 이른바 ‘나쁜 남성’을 비난하기는 쉽다. 잘못된 일도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잘못된 성적 행동으로 공개 망신을 당한 남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 국립 과학기술의학아카데미가 12일에 내놓은 311페이지 분량의 연구는 조직 내의 성희롱에 대한 보다 포괄적 관점을 제시하며, 성희롱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를 지적하고 있다. 놀랍게도 개인 가해자와는 별 연관이 없었다.

성희롱의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는 ‘기업의 문화’였다. 연구자들은 이를 ‘조직의 분위기’라고 불렀다.

조직이 희롱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 예상된다면, 희롱 발생 가능성은 작았다고 한다. 공정한 처우에 대한 믿음은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지력을 가지며, 노동자들이 희롱에 대해 발언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나쁜 행동을 막는 핵심 요건이다.

“암적인 존재를 솎아내는 게 다가 아니다. 전체를 봐야 한다. 조직이 성희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직원들이 성희롱할 가능성은 훨씬 낮아진다.”

이번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21명의 전문가 중 한명인 미시건 대학교 심리학 및 여성학 교수 릴리아 코티나의 말이다.

25년 가까이 성희롱을 연구하고 있는 코티나에 의하면 기업이 성희롱을 공정하게 다룰 것이라는 믿음은 잠재적 가해자에게도 전해져 이들이 희롱을 범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한다.

2년여 전부터 진행된 이번 연구에서 과학자, 공학자, 의사, 성희롱과 법, 심리학 전문가들이 최근 20년간의 저널을 검토했다. 과학, 공학, 의학계의 여성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여 그들의 답변도 들었다. 대규모 주립 대학교 두 곳의 학생과 교수단 설문조사도 분석했다.

이번 연구 결과 과학계에는 엄청난 희롱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으며, 특히 의대가 심했고 학생들이 희롱 대상이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전했다. 교수진 중 50% 이상은 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희롱 문화

 

이번 연구는 학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결과는 성범죄를 겪고 있는 민간 부문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와 관련한 현실의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성적으로 문제를 빚은 남성에 대한 최근 뉴스를 아무것이나 골라 파고 들어가 보면 ‘뒤틀린 기업 문화’가 있는 게 보통이다.

Lucas Jackson / Reuters
매트 라우어 

NBC 뉴스를 예로 들어보자. ‘투데이’의 호스트 매트 라우어가 희롱의 선을 넘는 행동을 자주 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작년 성범죄 혐의로 해고되었다.

라우어가 NBC 뉴스를 떠난 뒤 사내에서 진행된 내부 조사에 따르면 그는 “추파를 던졌고, 농담을 자주 했고 그 중엔 성적 의미가 담긴 것도 있었다. 직장에서 성적인 농담을 대놓고 했다.”

NBC 뉴스는 라우어의 행동과 관련해 68명의 전현직 직원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위 임원들은 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몰랐다고 한다.

NBC의 이 보고서는 외부 로펌에 맡기지 않고 내부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여기서는 NBC에 희롱 문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팀은 회사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 패턴이 널리 퍼져있거나, 뉴스 부서에 희롱 문화가 만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주장의 허점이 보인다.

이들이 만난 여성 중 몇 명은 라우어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생각했다. 외모를 성적으로 칭찬했다고 한다. ‘투데이’ 방송에서도 이 증거를 볼 수 있다. 이 여성들은 라우어의 유혹을 거부했지만 그는 계속했다고 한다.

NBC 조사팀은 라우어의 행동이 ‘적대적 근무 환경’의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우어는 여성들을 불편하게 느끼게 만들었고, 여성들로선 상황을 바꿀 힘이 거의 없었다.

그의 행동을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투데이’의 공동 진행자였던 앤 커리는 말렸지만,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다고 한다). 라우어의 행동이 여성들에게 불편하지 않아서? 아니다. 그들은 보복이 두려웠으며, 자신들의 호소가 비밀로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았다고 조사팀에 말했다.

이것이 조직의 분위기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NBC 직원들은 고위직에 남성이 대다수인 NBC가 스타인 라우어에 대한 문제를 듣고 싶지 않을 거란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직원들이 보복을 두려워하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지 않을 거라 믿는 환경에서는 가해자들(특히 스타들)이 나쁜 행동을 하고도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헐리우드에서 하비 웨인스타인이 여러 해 동안 희롱과 성폭력을 일삼고도 변호사 등을 동원해 무사히 넘어갔던 것을 보라. “당신이 스타면 하게 해준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성이 여성보다 많을 때

 

이번 연구에 의하면 두 번째로 강력한 예측 변수는 ‘조직 내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지’ 여부였다. 특히 높은 자리에 남성이 많은지가 중요했다. 이에 의하면 남성들이 많은 테크 및 금융 업계의 대규모 민간 기업들이 위험하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직업’이라 여겨진다면(테크와 금융이 좋은 예였다) 희롱의 위험도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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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은 성희롱에 속하는 여러 행동을 정의했다. 이중에는 불법이 아닌 행동도 있었다. 상대의 젠더에 대한 적대적 발언, 원치 않는 성적 접근, 로맨스에 대한 대가 제공 등이 포함되었다. ‘나와 섹스를 하면 승진시켜 주겠다’, ‘자지 않으면 해고하겠다’ 등이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접근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지 않더라도 혐오스러운 행동을 목격했을 때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도 살폈다.

우버의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는 자신의 직속 상사가 치근덕거려 신고했으나, 그가 실적이 좋고 이런 혐의가 제기된 게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징계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희롱에 대한 회사의 입장은 분명했다.

파울러가 블로그에 썼듯,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질 게 뻔한 싸움을 하기보다 직장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나이키에서는 여성들이 수시로 잘못된 처우를 받고, 비하당하고, 경시당한다고 한다. 뉴욕 타임스에 의하면 회식을 스트립 클럽으로 가기도 하고, 상사가 여성 직원을 만지기도 하고, 부서 전체가 여성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인사팀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었다. “보복이 있을까 봐,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인사팀에 아예 안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그런데 최근 나이키의 여성 직원들 일부가 CEO에게 직접 찾아가 문제를 제기해 문화적 격변이 일어났다.

뉴 리퍼블릭의 에디터와 필자들은 몇 년 동안 문학 담당 에디터인 레온 위셀티어의 성적 비행을 견뎌 왔다고 한다. 아무도 뉴 리퍼블릭이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이 거세지며, 작년에야 그의 잘못이 알려졌다. 그는 이미 뉴 리퍼블릭에서 나왔지만 이번 혐의 때문에 다른 유명한 직책은 맡지 못하게 되었다.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수치스럽게도, 그가 동료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항의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뉴 리퍼블릭의 에디터였던 프랭클린 포어의 말이다.

즉, ‘늘 그래왔다’는 얘기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래서는 안 된다. 파울러가 블로그에 글을 올린 뒤 우버는 아랫사람들을 괴롭히고 공격적으로 굴었던 CEO를 해임했다. 법무장관 출신인 에릭 홀더를 기용해 우버의 사내 문화를 바꾸도록 했으며, 이미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

 

더 나은 문화 만들어 가기

 

이번 연구에서는 희롱을 진심으로 없애고 싶어 하는 기업들을 위한 자세한 조언도 들어가 있다. 일단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희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명확한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둔감한 농담, 차별적 발언, 원치 않는 접근 등을 모은 목록을 가지고 있다.

Klaus Vedfelt via Getty Images

그리고 기업들은 ‘잘못된 행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기업들은 비밀스럽게 조치할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직원들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 비밀리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말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참 많다. 아무도 내막을 알지 못한다.

이번 연구자들은 희롱에 대한 익명 설문 조사를 권했다.

“무례와 조롱의 문화를 존중의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모두 문제를 의식해야 하며, 어디에 결함이 있는지 다들 깨닫고 바꿔 나가야 한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미시건 대학교 심리학 및 여성학 교수 코티나의 말이다.

 

* 허프포스트US의 기사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