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6월 16일 14시 51분 KST

왜 나는 32년 전 강간범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나?

NO는 YES를 의미했다. 짧은 치마는 유혹하려고 입는 것이었다. 애초에 내가 술에 취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도망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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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내 방. 혼자 잠에서 깼다. 구겨진 남자용 사각팬티가 밟힌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공용 화장실에 간다. 운동복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아 허벅지 안쪽을 본다. 멍이 들어 있다. 보라색, 빨간색, 퍼런색 멍이 손모양으로 나 있다.

어쩌다 생긴 건지 모르겠다.

나는 떨면서 방으로 돌아온다. 근처에 사는 내 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언니는 당장 달려온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조금 들려주고, 멍을 보여준다. 언니는 얼굴이 핼쑥해지며 내게 신발을 신으라고 한다. 택시를 불러서 나를 응급실로 데리고 간다. 성폭행 증거 수집 키트(rape kit) 검사를 받기 위해서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나는 차마 ‘강간(rape)’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했다. 그 단어는 내 목구멍을 막고, 숨을 못 쉬게 하고, 숨이 가빠지게 만들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저 단어를 쓰는 게 힘들다.

그 단어를 소리 내 말하면 트라우마를 촉발시킬 거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 단어를 쓰면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내가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이 사실로 될 것만 같았다. 그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혼란과 수치의 파도 밑으로 잠겨 들었다.

응급실에서 나는 하반신을 벗은 채 누워있다. 작은 방에는 의료용품이 가득하다. 금속 발걸이에 두 발을 대고 있고, 다리는 쫙 벌린 채다. 흰옷을 입은 두 여성이 내 옆에 서 있다. 한 명은 메모하고 있고, 다른 여성은 빗으로 내 음모를 빗으며 무엇을 발견했는지 중얼거린다.

“마른 액체.”라는 말이 들린다. 그들은 폴라로이드로 멍 사진을 찍는다. 의사 한 명이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휙 열고 들어와 나를 무시하는 티를 내며 캐비닛을 뒤진다. 내가 굴욕스러워서 일어나 앉으려 하니 그는 “주사기가 필요해서요.”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그를 복도로 밀어내지만 5분 뒤 다른 남성이 똑같은 행동을 한다. 나는 두 무릎을 모은다. 흐느낀다.

한 여성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한다. 그녀는 나갔다가 5분쯤 후에 돌아온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당자가 문에 범죄 현장 테이프를 붙여놓았다고 나중에 언니가 말해준다.

“OK, 에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 한 여성이 말한다.

“이젠 안전해요. 누가 이랬는지 우리한테 말해줘요.” 다른 여성이 말한다.

“기억이 안 나요.” 나는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다.

그들은 계속 묻는다.

나는 계속 우긴다.

결국 그들은 옷을 입게 해주었고, 나는 나온다.

기억나는 게 조금 있긴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는 않겠어. 특히 한 가지 기억은. 남성들이 불쑥 들어왔다 나간 지금은 안돼. 심지어, 아마 그러기 전이었다 해도.

파티가 끝나고 그가 걸어서 나를 데려다주던 게 기억난다. 그가 내게 키스했다. 나는 그를 밀어냈다. 안돼, 난 남자친구가 있어. 그가 다시 시도했다. 나는 다시 거부했다. 내 팔꿈치를 꽉 쥐는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막 내리기 시작한 축축한 큰 눈송이와 함께 정신이 빙글빙글 돌았다. 손가락이 내 팔로 파고들고, 그가 나를 내 방으로 밀고 간다. 정신이 멍해져 버렸다.

지금도 그와 내가 어떻게 내 방으로 왔는지, 내 옷이 어떻게 벗겨졌는지, 어쩌다 내가 그에게 깔려 침대에 누워있게 됐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런 상태였다. 그의 숨결이 내 귀에 뜨겁게 와닿았고 그는 내게 말했다.

“네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너도 원했잖아.”

난 그걸 원하지 않았고 게임을 한 것도 아니었다. 허벅지 안쪽, 갈비뼈, 팔 위쪽이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그가 끙끙거리며 밀어댈 때 나는 그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피임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말없이 내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일어나서 떨면서 서랍장으로 가서 피임 기구를 찾았다. 기구를 낀 뒤 자동적으로 침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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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총이나 칼이 없었고 내 목을 조르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일주일 뒤 겨울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갔더니 부모님에게 언니가 이미 말했다는 걸 느꼈다. 부모님은 내가 오랜 투병 끝에 회복 중인 환자인 것처럼 대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고 수프를 주었다.

그 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차를 만들려고 부엌으로 조용히 내려갔다. 부모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문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신고해봐야 소용없어, 그들은 아마 자초한 일일 거라고 생각할 거야.”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동의하는 것도 들렸다.

1980년대였다. No가 Yes로 받아들여 지곤 했다. 짧은 치마는 꼬리치기 위해 입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음, 애초에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잘못이었다.

데이트 강간에 대한 논의는 고사하고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당신이 아는 남성, 어쩌면 끌리기까지 하는 남성과 섹스를 한다면 그건 곧 당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안돼, 제발, 하지 마.”라고 웅얼거렸다 해도. 외쳤다 해도. ‘강간’이란 어두운 뒷골목에서 칼을 겨누거나 주먹으로 때리며 하는 것이지, 거친 말로만 강요하는 다른 학생에 의해 기숙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나의 집에도, 나의 삶에도, 내가 기댈 수 있는 목소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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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내 목에 닿은 칼날은 없었어도, 나는 그 방에서 걸어 나올 수 없었다.

나의 생존 본능은 감정적 고통에서 내 마음을 보호하는 쪽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나는 부모님보다 나의 요구를 중시하려면 엄청난 감정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집에서 자랐다. 나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혹은 부탁하는 대로) 하면, 그 대가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화가 나서 나를 마구 몰아붙였다. 어머니는 상처받고 슬퍼하며 내게서 거리를 두었다. 내가 내 입장을 옹호하면, 나는 모진 아이가 되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어렸을 때, 십대 때, 버림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나는 빠져들었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나 자신의 필요, 생각, 욕구를 깊이 파묻어버렸다. 나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선뜻 통제권을 넘겨버렸다. 특히 남성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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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자란 시대의 산물이다. 내 경우엔 1960년대, 70년대였다.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막 시작되던 때였고, 부모는 ‘착한 소녀’가 되려면 고분고분하고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몇 년 뒤에야 위험에 대한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사슴 이미지는 유명하다. 사슴은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눈앞에 육체적 위해가 있으면 사슴도 나도 마비되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훈련받지도, 반사 신경을 갖지도 못했다.

그날 밤,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 했던 그 남성은 나를 통제했다. 내가 반항의 고통을 피하도록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가는 것은 반항이었다. 나는 ‘착한 소녀’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냥 이 좋은 남성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식이었다. 지금도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도망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건 강간이었나, 혹은 내가 도망갈 수 있었고 도망갔어야 했던 불쾌한 만남이었나? 나는 피해자였나? 아니면, 그냥 내 책임인가?

내가 그날 밤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제 와서 중요하기라도 한가?

그렇다.

중요하다.

우리가 사건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에 깊은 영향을 준다. 그걸 깨닫는 데 32년이 걸렸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채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살인이라 부르느냐, 자살이나 사고라 부르느냐가 그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결정한다.

팔꿈치를 잡혔던 것, 멍이 든 내 몸, 그의 페니스가 내 몸 안에 들어왔을 때 비참한 상태로 의식을 되찾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기억은 내가 그를 규탄하기에 충분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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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동안 나는 내가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괴로웠다. 피임 기구 사용이 소급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일지 생각해 본다. 강요하는 그를 위해 침대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강간이었다가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바뀐 것일까.

수십 년간 자책해왔다. 깊고, 타오르는 수치심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내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닌 비난을 받는 데 지쳤다.

지금의 나라면 그 남성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알몸이든 아니든 소리를 지르며 그 방에서 뛰어나왔을 것이다. 당시엔 왜 그럴 생각조차 못 했는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힘들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치료를 받고 이제 중년이 되었다. 동의에 대한 사회적(그리고 나의) 인식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이제 지금의 관점에서 20세 때의 나를 되돌아볼 때다. 과거의 나와의 싸움은 그만두고,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받아들일 때다. 비난도 연민도 없이 과거의 나를 마주할 때다.

과거의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재하는 족쇄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 허프포스트US의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