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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평생 성차별에 맞서 싸웠다. 이제 그 싸움이 중대기로에 섰다.

보수 진영은 여성에게서 임신중단(낙태) 권리를 박탈하려는 운동을 벌여왔다.

  • Emily Peck
  • 입력 2020.09.21 13:55
  • 수정 2020.09.21 14:03
87세로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는 인파가 연방대법원 앞에 몰렸다. 2020년 9월19일.
87세로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는 인파가 연방대법원 앞에 몰렸다. 2020년 9월19일. ⓒmpi34/MediaPunch/MediaPunch/IPx

18일(현지시각) 87세를 일기로 사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은 여성과 남성이 가정과 바깥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처음에는 변호인으로, 나중에는 연방대법관으로, 긴즈버그는 신중하고 전략적인 법률 활동을 통해 성평등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인 권리로 바꿔냈다. 이 모든 건 그가 두 자녀를 키워내면서,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를 방해한 차별과 마주하면서 해낸 일이다.

이제 성평등을 위한 그의 투쟁은 위험에 처했다. 여성들은 임신중단(낙태) 권리를 잃을 위기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케어가 폐기된다면 피임 및 그와 관련된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된다. 민주당 의원들이 더 나은 보호 조항을 법으로 만드려고 시도하고는 있지만, 임신한 여성이 직장 내에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도 여성들은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채용을 거부당하고 있다. 긴즈버그가 결혼 이후 첫 아이를 가졌던 66년 전과 똑같은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진보적‘이라는 업체 ‘소울사이클’은 최근 임신한 임원을 승진에서 배제하고, 출산 직후 그를 해임한 일로 소송을 당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교육부는 성폭력을 당한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시민권 보호 장치들을 후퇴시키려고 하고 있다. 여성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는 남성에 비해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의 경우 임금격차는 훨씬 더 크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세대 전체의 여성들을 위협하고 있다. 여성들은 학교 수업이 원격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이뤄지는 동안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양육자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남성을 가사의 영역에 포함시키고자 했던 긴즈버그의 오랜 노력에도 여전히 양육을 책임지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게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걸려있다.” 국립여성법센터의 에밀리 마틴이 말했다. 그는 긴즈버그가 설립한 ACLU(미국자유인권연맹) 내 ‘여성의 권리 프로젝트’ 부소장으로 일했다.

트럼프는 19일 긴즈버그의 후임 대법관으로 여성을 지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여성인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는 극히 보수적인 인물이다. 독실한 가톨릭 교인인 그는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반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전역에서 임신중단을 합법화 했던 1973년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마틴은 ”현재의 규범을 깨고, 잘 정착된 것처럼 보이는 법과 판례들을 뒤집으려는 우파 진영의 운동이 벌어져왔다”고 말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기 위해 연방대법원 앞에 모인 사람들. 2020년 9월19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기 위해 연방대법원 앞에 모인 사람들. 2020년 9월19일.  ⓒNurPhoto via Getty Images

 

여성과 남성을 위한 투쟁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민주당)으로부터 연방대법관에 지명된 긴즈버그는 연설을 마무리 하면서 별세한 모친 실리아 베이더를 언급했다.

″여성도 포부를 갖고 그것을 이뤄내며,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딸들도 똑같이 소중히 여겨지는 그런 시대에 모친이 살았더라면 될 수 있었을 법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긴즈버그가 고등학생일 때 세상을 떠난 실리아 베이더가 딸을 자랑스러워 했을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긴즈버그가 ACLU에서 변호인으로 활동하면서 이뤄낸 것들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자라나는 소녀들에게 그들도 나중에 커서 연방대법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긴즈버그가 ACLU에서 ‘여성의 권리 프로젝트’를 시작한 1972년 당시 법전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법 조항이 1000개 넘게 있었다. 여성 혼자서는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게 하고, 주택담보대출도 받을 수 없게 한 법 조항들이 있었다. 남성이 모든 주도권을 갖고, 여성은 집에만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법 조항들이었다.

″그것들은 완전히 합법이었고, 연방대법원은 반대 되는 판결을 내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긴즈버그가 관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재 ‘여성의 권리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리아 타바코 마의 말이다. ”긴즈버그는 그 법 조항들을 겨냥했고, 덤벼들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선서를 하고 있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남성이 바로 남편 마틴 긴즈버그다. 1993년 8월10일.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선서를 하고 있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남성이 바로 남편 마틴 긴즈버그다. 1993년 8월10일. ⓒMark Reinstein/MediaPunch/MediaPunch/IPx

 

긴즈버그가 그렇게 한 건 차별을 당하고 있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관여한 주목할 만한 사건 중에는 출산 도중 사망한 아내 파울라를 대신해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싶어했던 스티븐 와이젠펠드가 낸 소송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아내와 사별한 남성은 (남편과 사별한 여성과는 달리)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사별한 남성이 집에서 아이를 볼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즈버그가 좋아했던 일들 중 하나는 양육에서 더 많은 책임을 맡고 싶어했던 남성들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마의 말이다. 그는 이같은 법적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ACLU는 남성에게 여성보다 짧은 육아휴가를 부여하는 JP모건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여성들이 집 바깥에서 완전한 평등을 이루려면 남성들이 집에서 동등하게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 마의 설명이다. ”남성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가 된다. 우리 모두는 집과 일터에서 모두 깊고 의미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그와 같은 목표를 더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어떤 면에서 긴즈버그가 꿈꿨던 그런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별 임금격차는 감소하고 있었고, ‘미투’ 운동으로 직장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높아졌다.

대학 졸업생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며, 로스쿨 입학생도 여성이 절반을 넘는다. 긴즈버그가 500여명 중 단 9명의 여성 중 하나로 하버드대 로스쿨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럼에도 임신중단 권리에서부터 의료 서비스, 동일임금, 성소수자 권리에 이르기까지, 트럼프 정부는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위한 제도들을 후퇴시켜왔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기 위해 연방대법원 앞에 모인 사람들. 2020년 9월19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을 추모하기 위해 연방대법원 앞에 모인 사람들. 2020년 9월19일.  ⓒASSOCIATED PRESS

 

잃어버린 세대

코로나19는 여성 인권의 진보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부의 대응 실패와 학교 수업 중단 때문에 한창 커리어를 쌓고 있는 수많은 고학력 여성들이 일터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은 코로나19로 인한 양육 부담 때문에 남성보다 일터를 떠날 가능성이 남성보다 세 배 높았다. 이 여성들이 언제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경제학자 마이클 매도위츠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잃어버린 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대는, 그에 따르면, ”어쩌면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인구”다.

긴즈버그는 양육을 둘러싼 성차별과 젠더 고정관념이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몸소 그걸 경험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처음 졸업했을 때, 긴즈버그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로펌들과 판사들은 여성 법조인을 뽑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긴즈버그는 결국 러트거즈대학 교수직을 얻었지만, 그는 남성 동료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 제인 셰런 드 하트가 쓴 전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삶’에 따르면, 긴즈버그가 학장에게 문제를 제기하자 학장은 ”부양할 가족이 있는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 게 공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긴즈버그도 처음에는 어린 딸과 투병 중인 시아버지를 돌보는 것과 일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데 하트는 긴즈버그가 ”(보호가 필요한) 두 세대 사이에 갇혔다”고 적었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일에 쏟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데 하트는 적었다. ”언제나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여성에게) 특별히 배려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종신교수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일터에서 밀려나면 다시 돌아가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긴즈버그는 버텼다.

시민권 운동 변호인들은 이제 긴즈버그가 남긴 유산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여성법센터의 마틴은 ”긴즈버그는 우리가 마땅히 애도 기간을 가져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이 시간이 두려움과 투쟁의 시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게 너무나도 부당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투쟁이야말로 긴즈버그가 바랬을 무엇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길을 짚어줬다.” 마틴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그 싸움에 나설 것이다.”

 

 * 허프포스트US의 RBG’s Fight For Women’s Rights Is More Urgent Than Ever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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